|
도입 “우리들은 조선 민족 대표자와 일본 정부와 협의하여 평화롭게 목적을 수행하려고 한다. 만일 불행하게 일본 정부가 이것을 용납하지 않을 때에는 어디까지든지 계속하여 그 운동 목적을 수행할 작정이다.”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지 못하는 동안은 아무래도 종교가가 정치에 관계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 국가가 종교를 도와주면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한에는 종교는 정치에 붙어 가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종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 것이다.”
이 글은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의암 손병희의 신문조서이다. 손병희는 동학의 3대 교주로서 교육․언론 분야의 애국 계몽 운동을 이끌었으며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어 민족 종교의 부흥을 꾀하였던 독립운동가이다.
역사적 배경배경현재 주소 |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 2리 385-2 (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의암로 234) |
---|
현재 상태 | 복원, 복원되면서 원래 구조와 다르게 변경되었다. |
---|
의암 손병희는 1861년 충북 청원에서 출생하였다. 1882년 22세 때 조카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하여 3년 후에는 교주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로서 수도에 전념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북접의 지도자로서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의 전봉준과 논산에서 연합하여 관군과 싸웠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여 원산과 강계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에서 이상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오세창, 박영효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려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를 조직한 후 이용구를 파견하여 국내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 모든 회원에게 단발령과 양복을 입게 하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인 보성사를 창립하고 보성, 동덕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에게 넘기고 우이동에 숨어 살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치료 중 사망하였다. 읽기 손병희는 1861년 충북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청주에서 아전으로 생활하였다. 손병희는 아버지인 손두흥과 첩인 경주 최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한 서출(庶出)이었다. 그는 집안과 밖에서 첩의 아들인 서출이라고 차별을 받았다. 자신이 서자이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울분에 찬 그는 술을 마시고, 도박장에 출입하고, 비슷한 친구를 모아 모임을 만들어 우두머리로 활동하였다. 또한 초정리 약수터에서 백성들이 물을 먹는 것을 방해하는 양반에게 흐린 물을 퍼서 끼얹은 적도 있어 그는 청주 일대에서 깡패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처럼 그는 방탕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지만 의로움만큼은 남달랐다. 12살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관가에 공금(公金)을 바치러 가다가, 길가에서 얼어 죽기 직전의 사람을 보고 주막에 데려가 공금을 사용하여 밥을 먹임으로써 목숨을 구했다. 또한 친구의 아버지가 공금을 횡령하였다가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에게 자신의 집에서 1,000냥을 훔쳐가게 하였다. 아버지가 걱정을 하자 아버지 앞에 나서서 “그 돈을 훔쳐가게 한 것은 바로 이 놈이올시다. 돈 1,000냥은 없다가도 생길 수 있으나, 아무개 아버지 목이야 한번 베이면 다시 생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20세 때 청주에서 주은 돈 300 냥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주인의 사례를 거절하였으며,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전염병일까 두려워하여 장사를 지내지 않은 시신 5 ~6구를 손수 거두어 장사를 지내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손병희는 신분 차별을 참지 못했고 어려운 사람을 자신보다 먼저 도와주는 품성을 갖고 있었다. - 질문1 손병희가 어린 시절 공부를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손병희가 신분 차별에 대한 적대감을 가졌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의 출생에서 찾아 써봅시다.
- 질문3 위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손병희의 인품에 대하여 써 봅시다.
손병희는 천안 목천 지역의 동학지도자인 김성지로부터 동학을 소개받아 관심을 가졌다. 손병희는 1882년 조카인 손천민을 통하여 동학을 믿게 되었다. 손천민이 “동학은“삼재팔난을 면하고, 모든 재앙을 면하는 도입니다.”라고 하니, 손병희는 “나는 “삼재팔난이 있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동학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손천민이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동학의 원리와 추구하는 방향을 설명하자 그제서야 입교하기를 결정하고 1882년 10월 5일 손천민 등이 참가한 가운데 입교식을 가졌다. 손병희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평등정신과 보국안민(輔國安民)ㆍ광제창생(廣濟蒼生) 등의 애민정신 그리고 민족주의 성향에 매력을 느껴 동학에 입교하였다. - 질문1 손병희에게 처음으로 동학을 소개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2 손병희를 동학에 입교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3 손병희가 나의 형이나 오빠일 때 나는 동학을 어떻게 대할지 써봅시다.
손병희는 동학농민운동 후인 1895년 무렵 평안도의 강계․후창․위원․자성 등 압록강 방면과 함경도 지방의 장진, 그리고 조ㆍ청ㆍ러의 국경지대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였다. 아울러 동학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기존 조직을 되살리고 서북지방에 새롭게 포교하여 평안도를 비롯한 서북지방이 동학의 주요한 지역이 되었다. 서북 지방은 다른 지방보다 문명개화 사상에 관심이 많았고 이 지역의 교인들이 많아지면서 손병희는 개화운동의 필요성을 보다 더 느끼게 되었다. 또한 손병희가 1897년 12월 24일 도통을 이어받았으나 1898년 최시형이 관군에 체포되어 사망하고 난 1900년 7월 무렵에 서북지역 교인들의 지지에 힘입어 실질적으로 교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손병희는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동학의 방향 전환을 꾀하였다. 동학과는 달리 합법적인 정치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주도하였던 독립협회의 활동에 주목하면서 반봉건 근대화의 길을 가기 위해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더라도 문명개화를 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1901년에는 “외국을 유람하여 문명 성질과 세계 형편을 자세히 알고 현대 문명을 수입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동학의 주요 인물로부터 문명국 답사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동의를 얻었다. 1901년부터 1906년 1월까지 일본에 머무르면서 조희문,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등 망명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망명을 통해 문명개화의 실상을 직접 보고 문명 개화노선에 적극 합류하면서 동학교도들에게 문명개화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 질문1 손병희가 서북지방의 포교를 통해 얻은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 질문2 손병희가 제국주의의 침략을 감수 하더라도 문명개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를 써봅시다.
“세계 대세를 살펴보니 온 세상이 모두 강해져서 비록 싸운다 할지라도, 같은 적수가 서로 대적하여 싸운 공이 없으리니, 이것을 오수불동(五獸不動)이라 말하느니라. 그러면 무기로만 싸운다는 것은 자연히 쓸데없는 것이 되는 것이요, 무기보다 더 무서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도전(道戰)이요, 둘째 재전(財戰)이요, 셋째 언전(言戰)이라. 이 세 가지를 능히 안 뒤에야 가히 문명에 나아가 보국안민과 평천하의 계책을 가히 얻어 이루리라. 이러므로 말을 거듭 청하여 삼전론을 말하노라.” 첫째, 도전이란 나라에 주된 종교가 없기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다고 지적하고 동학의 국교화를 통해 정치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동학을 기반으로 백성을 교화하여 정신문화의 향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재전이란 외국 자본의 침투로 국내 산업의 파괴와 식민지화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는 국내 산업 발전에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선발하여 외국에 유학시키는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언전은 외교를 말하는 것이다. 복잡한 세계정세와 동서양의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지는 개방화된 시대에 외교에 필요한 언어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 질문1 『삼전론(三戰論)』은 무엇인가요?
- 질문2 도전이란 무엇인가요?
- 질문3 재전에서 이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 질문4 언전에서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5 여러분은 무기보다 무서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써봅시다.
손병희는 일본에 체류하면서 동학의 합법화와 문명개화노선에 입각한 국정 개혁을 요구하며 정치 투쟁을 계속하였다. 1903년 동학 간부인 이인숙을 통해 국회를 설립하고 종교를 반포하며 재정을 정리하고 정치를 개선하며 유학을 장려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손병희는 민심의 통합과 백성의 힘을 결집하기 위한 종교의 반포를 강조했다. 이를 통해 손병희의 정치 투쟁의 1차 목표가 동학의 합법화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손병희는 1904년 9월 이용구에게 진보회를 조직하여 독립협회 식의 민회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하였다. 진보회는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하고 정부를 개선하며 군정과 재정을 정리하고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보수파의 반대와 진보회를 개화한 동학당으로 여기며 탄압한 정부의 태도로 어려움에 빠졌다. 아울러 문명개화를 상징하는 진보회원의 단발과 양복의 착용은 민회운동에 대한 대중적 거부감을 확산시켰다. 이처럼 상소운동과 진보회의 민회운동 등 여러 방식을 동원한 동학의 합법화, 정치세력화, 그리고 문명개화로의 국정방향의 전환을 촉구하는 운동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 질문1 상소운동의 내용으로 볼 때 손병희의 정치 투쟁의 1차 목표는 무엇이었나요?
- 질문2 손병희의 지시에 조직된 진보회의 민회운동이 실패한 이유를 세 가지 써봅시다.
1907년 11월에 결성된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 계열, 전직 관료 및 천도교 지도부가 결집한 합법적인 재야 정치 단체였다. “정치, 교육, 산업을 강구하여 사회지식을 발달시키며 신진 덕성을 도야하며 전국 부력(富力)을 증진하여 국민적 자격을 양성한다”는 취지로 발족한 대한협회를 천도교 지도자들은 정당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 정부가 힘이 없어지면서 근대화 노선을 둘러싼 대정부 투쟁이 무의미해지자, 대한협회는 보호국체제하에서의 정권 획득을 추구하는 정당 활동에 주력했다. 대한협회는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를 비판하는데 힘을 쏟으면서 다른 애국계몽운동단체의 지지를 얻어나갔다. 대한협회의 주장은 선진 문명국인 일본의 지도에 의한 예속적 발전을 추구한 것으로, 결국 동양문명의 선도자라고 극찬했던 일본에 의해 자행된 강제 병합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으며 손병희의 정당운동도 실패하였다. - 질문1 대한협회는 누가 조직했나요?
- 질문2 대한협회가 추구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대한협회의 활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난 이유를 써봅시다.
1910년대 손병희가 합법적으로 활동이 가능했던 분야는 실력양성운동뿐이었다. 경제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손병희는 주로 학교경영을 통한 교육운동과 기관지 발간 등의 언론활동에 주력하였다. 손병희는 “문명학술을 배우게 함이 국가장래를 위하여 크게 유익하다”며 1900년대 초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64명의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일찍부터 교육운동에 뛰어든 경험이 있었다. 귀국 후에는 재정난에 처한 사립보성학교와 합동소학교 등 여러 학교에 찬조금을 기부했다. 이러한 손병희의 교육운동에 감격한 『황성신문』은 ‘애국지사’라는 찬사를 표하기도 했다. 1910년대에 들어와 손병희는 본격적인 학교 경영에 뛰어 들었다. 당시 가장 비중 있는 사립교육기관이던 보성학원의 보성전문학교, 보성중학교, 보성소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위기에 처하자 손병희가 1910년 12월에 인수하여 보성학원 경영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동덕여학교를 비롯하여 서울의 문창학교, 보창학교, 대구의 명신여학교 등도 인수했다. 손병희의 고향인 청주에는 종학학교를 설립했으며 서울의 양덕여학교, 오성학교, 대구의 교남학교와 청주 청북학교 등의 경영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일반 학교 경영과 함께 손병희는 전국에 교리강습소를 설립해 천도교인의 문명개화를 도모했다. 천도교리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신지식을 배양하기 위한’ 보통학교 수준의 일반교육을 실시한 점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손병희는 교리강습소를 운영할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1909년 사범강습소를 설치하여 중등학교와 동일한 수준과 내용을 교육하였다. 학교경영과 교리강습소를 통한 실력양성운동은 3․1운동 이후의 교단 분규와 재정위기로 인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채 점차 위축되어 갔다. - 질문1 손병희가 주력했던 실력양성운동의 분야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교리강습소가 대성황을 이룬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손병희의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이 위축되어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손병희는 1906년 1월 일본에서 귀국하여 2월에 활판인쇄소인 박문사를 설치하였다. 그 후 박문사를 주식회사 보성각으로 바꾸고 천도교 일간지인 『만세보』를 발행하였다. 『만세보』는 처음부터 국한문 혼용을 하면서 서민 대중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매판행위를 규탄하는 등 애국계몽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창간 1년 만에 폐간되었다. 또한, 손병희는 1910년 8월 15일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를 창간했다. 『천도교회월보』는 ‘교리의 발명과 학술 기예의 발전’을 지향하면서 종교계몽, 사회계몽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1910년대 내내 꾸준히 발간된 유일한 잡지인 『천도교회월보』는 천도교인들 간의 교류와 문명의 이기를 접할 수 있는 통로 구실을 하였다. 또한 출판의 자유를 박탈당한 암울한 현실에서 천도교인들에게 제공되는 유일한 지적 자산이었으므로 그들의 세계관, 역사인식, 사회인식, 민족의식에 미친 영향은 아주 컸다. 이처럼, 손병희의 서구적 근대와 일본적 서구를 지향하는 문명개화노선은 나라가 망해 자주성이 유린당하고 정치활동이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도 교육과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커진 교세를 바탕으로 오히려 대한제국 시기보다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손병희는 실력이 있어야 독립이 가능하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 질문1 『만세보』의 역사적 의의를 써봅시다.
- 질문2 『천도교회월보』가 천도교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손병희는 3․1운동 후 판사의 신문에 “어려서부터 동학을 믿었기 때문에 가슴 속에서 국가적 관념과 민족적 관념을 생각하고 있다.”고 답하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동학, 천도교 사상에 입각하여 국가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종교철학적인 측면에서도 그는 종교의 정치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손병희는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독립시키면, 중국의 감정도 완화되어 장래 동양의 평화에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손병희는 일본의 조선 지배와 조선인들을 무시하는 태도에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손병희는 1919년 1월경 신문을 통해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을 읽고, 국제사회가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변하고 조선의 독립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1월 하순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수차례 협의하여, 동지를 모아 손병희 등 조선민족 대표자의 이름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또 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조선 각지에 배포하며 민중으로 하여금 조선독립의 시위운동을 일으키게 하여 독립에 대한 조선민족의 열망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아울러 손병희는 일본의 정부와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의 여러 나라 대표에게 조선독립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독립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고자 하였다. 이 무렵, 손병희는 3․1운동 추진 시 지켜야 세 가지 원칙으로 첫째, 독립운동은 대중화하여야 할 것, 둘째, 독립운동은 일원화하여야 할 것, 셋째, 독립운동의 방법은 비폭력으로 할 것 등을 정하였다. 손병희는 대중이 참여하고, 의견과 행동을 일치시켜, 비폭력의 방식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손병희는 이 일의 실행을 최린, 권동진, 오세창에게 담당하게 하였다. 최린은 독립선언서와 건의서 및 청원서의 작성을 최남선에게 의뢰하였다. 또 권동진, 오세창, 최린은 2월 20~24일 기독교 측의 이승훈, 함태영 등과 협의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ㆍ배포, 독립선언식의 개최, 독립만세운동의 거행을 결정하고,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는 15명, 기독교는 16명, 불교는 2명으로 정했다. 손병희는 2월 21일 최린이 와서 임규가 일본의 내각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데 드는 비용 200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기독교 측에서 5,000원을 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말하자, 선뜻 자신의 돈 200원(현재 약 8백만원)을 제공하고, 천도교금융관장 노헌용과 대도주 박인호에게 공금 중에서 5,000원(현재 약 2억원)을 주라고 지시하였다. 손병희는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천도교계의 민족 대표 15명을 정하고 2월 27일 독립선언서에 날인하게 하였다. 그리고 손병희는 2월 28일 자신의 집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민족대표를 불러 만났다. 이 때 손병희는 학생들이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위를 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기자고 건의하였다. 손병희는 2월 28일 오전 천도교 대도주인 박인호에게 “그대는 천도교를 주관하고 있으므로 천도교의 일은 전부 그대에게 맡긴다. 안심하고 있으라. 나는 우리 선조들이 4천년을 두고 내려오며 이 조선에 분묘를 두고 있으니, 이 때 그냥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국가를 위해 일하고자 하니 그대는 어디까지든지 종교를 위하여 힘써 달라. 그리고 다수의 교인이 그대를 쫓아서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그대는 교도를 단속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손병희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 구속될 것을 알고, 천도교의 지도를 박인호에게 특별히 부탁하였던 것이다. 손병희는 3․1운동을 통하여 독립이 되면 국가의 정체를 민주공화제로 만들려고 하였고 군주제를 비판하고 입헌제를 찬성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도, 그는 우이동의 수련원에 가서 “전쟁이 끝나면 세계의 상태가 일변하여 세계에 임금이란 것이 없어지게 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판사의 신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자신은 민주정체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 질문1 손병희가 조선의 독립을 원했던 이유를 다섯 가지 중 세 가지 이상 써봅시다.
- 질문2 1919년 1월 하순 손병희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택했던 방법 세 가지를 써봅시다.
- 질문3 손병희가 정한 3․1운동 추진 시 지켜야 원칙 세 가지는 무엇인가요?
- 질문4 손병희가 꿈꾸었던 정치 체제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손병희 선생이 살던 서울의 집 - 질문1 3·1독립선언이 있기 전날 이 집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1905년 손병희가 동지들과 찍은 사진(앞줄 오른쪽 두 번째) - 질문1 이들이 일본에서 보고 배운 점은 무엇일까요?
- 질문2 일본의 망명 생활이 이후 손병희의 활동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요?
모둠활동모둠활동 1 모둠별로 손병희가 이끈 천도교와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가 전개한 독립운동의 내용을 조사하여 비교, 토론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손병희가 전개한 교육운동과 언론활동 등 실력양성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비교하여 모둠끼리 정리한 내용과 주장을 PPT로 작성해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손병희의 독립운동을 연극으로 만들기 위한 대본을 써봅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