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원암 기도와 항일의 다짐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이후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이것이 빌미가 돼 폐위됐고 군대마저 해산됐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의병 전쟁을 일으켰으나 일제는 강압적으로 진압했다. 호남 의병을 섬멸하기 위한 ‘남한대토벌작전’은 동학혁명 때의 ‘삼로포위토멸작전’의 복사판이었다. 손병희는 이렇게 국권이 피탈되는 상황에서 천도교를 전면에 내세워 정부를 대신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용구의 배반과 개혁을 추진했던 일본인의 급사, 그리고 국내와 연락하던 동생 병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무산됐다. 일이 틀어지자 손병희는 “이것도 천운(天運)이다”라고 하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후일을 기약했다.
일본에서 외유를 마치고 동학을 근대적 종교로 탈바꿈시켜 천도교로 교명을 바꾸고 근대적 종단을 만들고 이용구 등 교단 내 친일 세력을 제거한 손병희는 국권이 침탈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천도교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손병희는 수운 최제우가 기도했던 양산 내원암(內院庵)을 찾았다. 손병희는 1909년 12월 최준모(崔俊模), 임명수(林明洙), 김상규(金相奎), 조기간(趙基竿) 등 제자 4명과 함께 내원암을 찾아 49일 기도에 들어갔다. 손병희는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의 마음으로 돌아가 난국을 타개하는 방책을 찾으려 했다. 당시 손병희의 나이 49세였다.
적멸굴 답사와 수운의 성령과 합일
손병희는 내원암에서 기도 중 주지 이퇴운의 스승인 손석담으로부터 최제우가 공부했다는 적멸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다음 날 바로 등반했다. 당시 손병희를 따라 기도에 참여했던 조기간은 <신인간> 제138호(1939.10)에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다음날은 평소보다 더욱 일찍이 서두르시더니 점심도 좀 일찍 잡수시고 야! 오늘일랑 좀더 멀리 운동을 가보자고 하시면서 나서시니 … 그 젊은 중이 앞장을 서서 그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 성사(聖師, 손병희) 묵묵히 엄격하신 태도로 손에 쥐이신 단주만 돌리시면서 앉아 계시더니 고요히 일어나시면서 “인재들 올라오나! 나는 오기는 벌써 올라왔는데 나는 이곳에 오자마자 홀연히 글 한 귀가 생각이 났는데 석시(昔時)에 차지견(此地見), 금일(今日)에 우간간(又看看)이라 하였소.” 하시었다. 이글을 말로 새긴다면 옛날에도 이 땅을 보았더니 오늘날에 또 그전에 본 땅을 본다는 뜻이다.
손병희는 적멸굴로 들어서자마자 정신이 황홀해졌다. 손병희는 적멸굴을 처음 방문했지만, 예전에 자주 보았던 익숙한 장소처럼 다가왔다. 손병희의 몸에 수운의 성령이 접한 것이다. 즉, 손병희는 최제우가 공부했던 적멸굴에서 수운과 성령상 하나가 되는 신비한 종교체험을 했다. 적멸굴에서의 종교적 성취는 이후 손병희가 천도교의 사후관인 ‘성령출세(性靈出世)를 확립하는 데 바탕이 됐다. 또 이 체험은 일제강점기 손병희와 천도교 항일 활동의 출발점이 됐다. 손병희는 동학혁명에 참여하며 일본군에 의해 수만의 교도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았지만,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제의 발전상을 보고 천도교 발전을 위해 일본과 손을 잡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멸굴에서 최제우의 성령과 하나 됨을 통해 수운이 한글 경전인 <용담유사>에서 적은 ‘개 같은 왜적 놈’의 참뜻을 알게 됐다. 이후 손병희는 항일 운동을 위해 천도교를 성장시켰고 결국 3·1독립만세운동을 영도했다.
봉황각의 건립과 독립운동의 준비
기도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손병희는 국권 회복을 위해 천도교인들을 교육해 적절한 시기에 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손병희는 당시 경기도 고양군에 속해 있던 우이동의 땅을 매입해 봉황각(鳳凰閣)을 건립했다. 우이동은 북벌을 계획하던 효종이 화살대로 만들고자 벚나무를 심을 정도로 국난 극복의 뜻이 담긴 곳이었다. 손병희는 우이동의 약 2만8000평을 800원으로 매입해 1912년 봄부터 봉황각 건립 공사를 시작해 6월 19일에 낙성식을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인재 양성에 나섰다.
손병희는 봉황각 신축 직후인 1912년 8월 15일부터 연성(鍊性)을 시작했다. 손병희는 봉황각에서 제자들을 직접 지도하면서 ‘이신환성(以身換性)’과 ‘성령출세(性靈出世)’를 강조했다. ‘이신환성’은 육신에 얽매이지 말고 한울님 본체에 충실하라는 뜻인데 이는 교회와 사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라는 의미였다. ‘성령출세’는 천도교의 깊은 수련을 하면 죽고 나서도 자기 뜻을 후손과 후학을 통해 이어나갈 수 있다는 뜻으로 생사가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이들 법설은 자신의 몸을 교회와 국권 회복을 위해 투신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손병희는 표면적으로는 수련을 지도했지만, 속으로는 천도교인으로 하여금 독립 정신을 고양해 목숨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가르쳤다.
손병희는 1912년 4월부터 1914년 3월까지 7차에 걸쳐 483명의 지방의 두목을 불러 49일 특별 기도를 시켰다. 제1회 연성회(練性會)는 봉황각이 완공되기 이전이라 도선암을 빌려서 사용했다. 제1회 연성회에 참여한 21명의 두목 중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한 박준승(朴準承), 라인협(羅仁協), 임예환(林禮煥), 홍기조(洪基兆) 등이 포함돼 있었다. 봉황각에서 연성을 마친 교역자들은 270여 개 지방의 교구로 돌아가 교인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취했다. 손병희는 성미제의 도입과 1918년 중앙대교당을 건축한다는 명목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으며 이 자금이 3‧1 독립운동에 쓰였다.
▲ 손병희 내원사 기도 각석. 내원사 금강교를 지나 병풍처럼 둘러싼 바위에는 내원사 49일 기도를 기념해 천도교 3세 교조 손병희와 임명수, 최준모, 김상규, 조기간 등 4명의 제자, 그리고 각석을 만든 박명선과 윤구영 등 총 7명의 이름을 새겼다. 각석의 포덕 51년은 1910년이다. |
민족자결주의와 3·1독립만세운동의 준비
손병희는 이렇게 교단의 인재를 양성하며 천도교를 국내 최고의 종단으로 성장시켰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을 갖고 있던 많은 지식인도 천도교에 입교해 천도교는 3·1 운동 직전에는 200만의 교도를 가진 종단으로 성장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라 제기된 민족자결 원칙과 파리강화회의 개최를 앞두고 이를 기회로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손병희는 교단 내적으로는 1919년 1월부터 49일의 기도회를 하고 교인들의 독립운동을 위한 정신 자세를 갖추게 했다. 손병희는 독립운동의 방략을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하려는 원칙을 정했다. 이는 동학혁명의 폭력적 항쟁 경험에서 비롯됐다. 손병희는 이 3대 원칙으로 민족 내부의 역량을 결집해 일제에 항거하고자 했다. 그리고 민족진영과의 연대를 최린, 권동진, 오세창에게 맡겼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손병희 등은 고종의 인산(因山, 국장)에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일대 모험이었다. 온갖 고난을 뚫고 이룩한 천도교가 어쩌면 종말을 고할지 모르는 국면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손병희는 오세창, 권동진, 최린 등을 시켜 운동에 참여할 구한말 고관과 귀족 출신 인사의 포섭을 시도했고 언론 학생 농민 등 통일전선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한말의 고관과 귀족들이 참여를 거부하자 종교계를 중심으로 민족대표를 구성하기로 했다. 민족대표 33인으로는 천도교 15명, 개신교 16명, 불교 2명으로 정해졌다. 손병희는 일제강점기 이후 10년 동안 교단을 성장시키고 인재를 양성해 이를 3·1독립만세운동에 모두 쏟았다. 이리하여 세계 식민지 국가에서 가장 격렬하고 규모가 컸으며 영향력이 널리 끼친 3·1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일제는 1919년 9월 육군성에서 발간한 <조선소요경과개요(朝鮮騷擾經過槪要)>에서 천도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도교는 종교라고 인정할 가치가 없고 교주(손병희) 등 간부가 정치적 야심의 허용으로 조직된 단체로 과도한 미신에 부한 국민성을 이용해 어리석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교주 자신이 황당무계한 예언을 전해(신탁을 칭함) 그 신앙을 번성시켜 유지해오고 있음에도 민중의 문화를 점진시킴에 따라 종교로서의 근본적 지위가 위태롭게 되어 어떤 방법을 강구해도 그 존재가 부정될 운명으로 관련되어 고려되고 있다.
일제는 천도교가 3·1독립만세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해 천도교를 종교가 아닌 정치적 야심을 가진 인물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현혹해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등 일제에 저항하는 단체라고 인식해 이를 없애야 한다는 의견까지 내놓았다. 손병희는 이렇게 천도교의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해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일제는 식민지배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천도교를 없애려고 했다. 손병희는 서대문형무소 52호 감방에 수감됐다. 심문과정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했으며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 당국도 놀란 거대한 민족운동이었다. 동학혁명이 항일전선에서 최초로 폭력적 방법을 추구했다면, 3·1운동은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그 운동은 국내만이 아니라 만주와 러시아 땅 연해주와 미주 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마침내 상해 임시정부를 발족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냈다.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일제의 패망까지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토양이 됐다. 손병희는 3·1독립만세운동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 신한민보 1919년 4월 12일자 신문. 손병희를 대한공화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있다. |
손병희는 3·1독립만세운동의 임시정부 구성에도 등장했다. 국내의 천도교도들에 의해 주도된 대한민간정부와 조선민국임시정부, 그리고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그러나 서대문감옥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에 임시정부 활동을 이끌 수가 없었다. 손병희는 재판 과정에서 고문을 받아 전신 마비의 중병을 얻어 보석을 신청했으나 일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 이상 치료가 어려운 상태에 이르자 1920년 10월 20일 병보석으로 풀려나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에 기거하면서 치료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보안법’, ‘형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보석 후 병세가 약간 호전됐으나 결국 1922년 5월 19일 만 61세의 나이로 환원했다. 천도교회장으로 영결식을 갖고 서울 우이동에 안장됐다. 손병희는 3·1독립만세운동을 영도한 인물임에도 세간에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다.
▲ 손병희의 운구 행렬. 사진의 여학생들은 동덕여학교 학생들이다. 일제는 손병희의 운구를 차로 이송시키려 했다. 그러나 천도교인들과 시민들이 저항하자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삼선교까지의 운구만 허용했다. |
▲ 손병희 묘소를 참배하는 이승만. 1956년 3·1절을 맞아 우이동의 손병희 묘소를 참배해 헌화하고 있다. |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