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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한독립선언서 선언일자 논란 2012-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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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
단기4252년 2월..발표했다고 해서..
3.1독립선언 이후인 1919년 3월 13일을 보는 주장

[2설]
양력으로 단기4252년 2월이면..
음력으로 1918년 11월? 에 선포했다고 해서..
일명..무오독립선언이라고 주장하는 최초의 독립선언서 논란은 진행중..

[종합]
물리적으로 단기4252년 2월을 양력으로 보고 음력으로 해석해도 1919년 1월 1일 이 된다고 한다..
일단 무오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적어도 시기의 해석자체가 왜곡, 조작된 증거로 보자면..
원문에 선언날짜가 공백이고..발표시기 등이 불명하고..
무오년이 아니라면 기미년닐수 밖에 없는데..
첫째, 원문이라면서도 연도자체가 논란이 되는 것이 큰 의문이며..
둘째, 누가 주도했는지 조차 불분명하는 등..
2.8학생독립선언에 이은 완결판 3.1독립선언의 위대한 창조성과 찬연한 역사성이 바로 대한민국정부로
이어지는 등의 역사적 사실을 폄하하기 위한 조작 및 훼절하고자 하는 정황이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다.

UIRI에서 분석, 연구결과 발표 예정임.

* 의암경영연구소 *


[1설 자료]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 시기에 대한 증빙자료는 현재로는 선언서에 기록된 '建國紀元 4252年 2月'

그리고 조소앙의 자전 글과 지산외유일지 밖에 없다. ‘

建國紀元 4252年 2月' 을 음력으로 보느냐 양력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 그동안 학계의 치열한 논란이었다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단기 4252년 2월을 가장 빠른 날, 즉 1919년 2월 1일을 양력으로 보고

음력으로 변환하면 1919년 1월 1일이 된다.

建國紀元 4252年 2月을 음력으로 보든 양력으로 보든 무오년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다음 조소앙의 자전 글을 보자.

 

“조용히 吉林省城에서 독서하였다.

1919년 1월에 이르러, 여준, 김좌진, 박남파 , 손일민 등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대한독립의군부를 창립하였다.

여준은 정령이 되었고, 나는 부령의 임무를 맡아 <대한독립선언서>를 손수 기초하였다.

국내 대표가 가져온 독립선언서의 초고를 살펴보고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하였다.

바로 그날 남하하여 상해로 와서 임시 의정원과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조소앙, 「자전」(1943,4) 『소앙선생문집』하, 157쪽>

 

“1919년 2월 나는 길림성성에서 대한독립의군부를 건립하였다.

여준, 조소앙, 김좌진, 박찬익, 황상규 등을 추대하여 主指하도록 하였으며, 아울러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국내에서 밀파한 나모(나경석을 말함)가 길림에 와서 국내에서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손수 전하였으니,

곧 손병희 선생 등이 서명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금 길림에서 발표한 독립선언서를 들어 특별히 세상에 공개하여 참고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서명자는 무릇 39인이니 대부분은 凋落하였다. 그 중 10인이 현재 한국독립당원에 속해 있다.”

<조항래, 「무오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 경위와 그 의의에 관한 검토 」

『무오대한독립선언서 선포 제 72주년 기념식 및 학술심포지움 』1991.1.30. 삼균학회, 19쪽에서 재인용>

 

“나는 당시(3.1운동 시) 길림에 있어서 김좌진, 박남파, 황상규 등 동지와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해 가지고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독립운동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연락원으로 나경석씨가 국내 독립선언서의 초고를 가지고 와서 국내의 정세를 알게 되었다.

상해로부터 대표를 파견하라는 전보를 받고 내가 대표로 상해로 와서 보니 참으로 감격할 풍정이었다.”

<조소앙, 「3.1운동과 나」(1946.2)『소앙선생문집』하, 67~68쪽>

 

첫 번째 인용 글에선 1919년 1월에 대한독립의군부를 창립하고,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고 하며,

두 번째 인용 글은 1919년 2월에 대한독립의군부를 창립하고,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고 한다.

사실 모두 맞다. 그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지산외유일지와 비교해 보면 확인할 수 있다.

 

1월 24일(양력 1919.2.24) (월).

북문 밖 여시당(呂時堂) 댁에 모여서 독립 운동 추진 방법을 토의하는데,

회집된 인원은 박남파·조소앙·황상규(黃尙奎)·김좌진·박관해(朴觀海)·정운해(鄭雲海)·송재일(宋在日)·손일민(孫一民)·

성낙신(成樂信)·김동삼·여시당 그리고 나인데, 김약수는 참가하지 않으니 좌중에 불평이 있었다.

 

1월 27일(양력 1919.2.27) (목).

시당 선생 댁에 회접하여 대한독립의군부(즉 군정서의 전신)를 조직하는데,

시당여준(呂準)씨가 총재로 추대되고, 총무겸 외무에 박찬익(朴賛翊)이요, 재무에는 황상규(黃尙圭)요,

군무에는 김좌진이요, 서무에는 정원택(鄭元澤)이요, 선전겸 연락에는 정운해(鄭雲海) 등이 피선되었다.

 

1월 28일(양력 1919.2.28) (금).

의군부 부서를 정하고 서무에 착수하며,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진행방침을 결의하니,

첫째는 상해에 길림 대표를 파견하여 민속하게 연락을 취할 것,

둘째는 마필(馬匹)과 무기를 구입할 것,

셋째는 근지 각처와 구미 각처에 선언서를 발송할 것,

넷째는 서북 간도와 아령(俄領)에 민속한 연락을 취할 것,

다섯째는 자금 모집을 위하여 비밀히 국내에 인원을 파견할 것 등 기타 여러 항이었다.

상해 대표 파견은 나의 역천(力薦)으로 조소앙이 선정되고,

마필·군기 매입은 김좌진이 중국 친구 수명을 대동하고 러시아 땅으로 향하기로 하고,

선언서는 조소앙이 기초하여 내가 인쇄, 발송하기로 책임 맡고,

서북 간도에의 연락은 성낙신(成樂信)·김문삼(金文三)이 맡고,

국내로 들어가 자금을 조달하는 운동은 정운해(鄭雲海)가 맡았다.

 

1월 29일(양력 3월 2일).(양력 1919.3.1) (토)

오후에 상해로부터 온 전보를 접하니, 한성이 이미 움직인다고 하였으며,

또 상해 서신을 접하니 임시정부 수립 예비로 각계 지사들이 운집하였다고 하였다.

 

2월 1일(양력 1919.3.2) (일).

소앙과 상의하여 선언서를 기초하는데,

소앙의 계씨 조용주(趙鏞周)가 본국으로부터 내도하여 서로 협의 기초하였다.

 

2월 2일(양력 1919.3.3) (월).

서울에서 온 신문을 보니 양력 3월 1일(음력 정월 29일)에 서울에서 천도교주 손병희 이하 몇 사람과,

불교측, 예수교 목사 및 학생 수인, 합계 33인이 명월관에 회집 의정하고, 탑골공원에 민중을 소집하고,

대한 독립을 선언하며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니 민중이 계속하여 시위 행렬을 진행하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를 연창하니, 이를 진압코자 경찰과 군대가 출동하여 대혼란을 이루었으며,

경향 각처가 일치하여 방방곡곡 벽지까지, 어느 곳을 막론하고 민중 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하였다.

 

2월 10일(양력 1919.3.11) (화).

선언서 4천부를 석판으로 인쇄하여, 서북간도와 아령(俄領)과 구미(歐美) 각국 및

북경·상해와 국내, 일본에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 )안의 양력은 필자가 삽입했음,

지산외유일지는 음력을 기본으로 기록했으나, 가끔 양력을 추가로 기입한 부분이 있는데,

대부분 하루나 이틀 차이가 난다. 이것은 정원택의 착오로 보인다.

 

소앙선생문집에선 음력을 사용하였고,

조항래 교수는 조소앙의 글을 인용하면서 양력으로 환산하였을 뿐이다.

정리를 하자면,

대한독립의군부는 1919년 음력 1월 27일(양력 1919.2.27) 결성되었고,

길림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2월 1일(양력 1919.3.2) 작성되어,

음력 2월 10일(양력 1919.3.11) 발송되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학자들은 왜 지금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발표 시기에 대한 논쟁을 그치지 못하고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혹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이 선언서의 발표시기가 문제되는 것은,

삼균학회를 비롯한 조소앙을 숭앙하는 단체들은 조소앙이 작성한 무오독립선언서가 2.8 동경선언과 3.1독립선언에

영향을 끼친 선구적인 선언서임을 증명하고자함이요,

송우혜 등은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여,

오히려 3.1독립운동선언서가 대한독립선언서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필자의 의견은, 미안하지만 두 견해 모두 틀렸음을 지적하는 바이다.

발표 시기에 대해선 송우혜의 말이 맞지만,

대한독립선언서가 국내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고 작성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논리의 타당성을 제외하고,

차라리 억지에 가까운 괴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송교수의 의견을 반박하는 조교수의 논문을 자세히 검토하지 않더라도,

선언서 작성 시 조선의 상황도 잘 몰랐다는 조소앙의 고백 글이나 상기 지산외유일지를 읽어봐도

송교수의 주장이 억지요 무리란 것을 알 수 있으리라 본다.

 

삼균학회측도 날짜의 오류뿐 아니라, 상기 대한독립선언서를 조소앙이 작성자라고 한다면,

시간상 2.8독립선언이나 3.1독립선언에 물리적으로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러면 이 문서는 서로 간 전혀 영향을 끼친 바 없는 독자적인 글일까?

이 부분을 확인하기 전에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 주체부터 거론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2설 자료]

"육탄혈전으로…" 우리 민족 첫 독립선언서 原本 발견

입력 : 2009.02.14 03:10 / 수정 : 2009.02.14 14:36

'기미 선언'보다 앞선 '무오 독립선언서'… 무장노선 촉구
조소앙 선생이 작성… 이승만·김좌진·신채호 등 참여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최초로 선포한 독립선언서인 1918년 11월(또는 1919년 2월)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원본이 처음 발견됐다. '무오(戊午) 독립선언서'라고도 불리는 이 선언서는 '기미(己未) 독립선언서'보다 앞서 나온 것으로,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서지학자이자 애국가 연구가인 김연갑(金煉甲)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최근 발굴한 '대한독립선언서'의 원문을 11일 본지에 공개했다. 그는 "6년 전 아리랑 조사를 위해 중국에 갔다가 옌지(延吉)의 한 동포가 '대한독립선언서'를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최근 이 동포가 작고한 뒤 그 아들이 자료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가로 51.8㎝, 세로 37.5㎝ 크기의 이 문서는 '大韓獨立宣言書'라는 제목 왼쪽에 세로로 선언서 전문을 실은 석판 인쇄본이며 왼쪽 아래에 서명자 39명의 이름을 명기했다.
‘대한독립선언서’의 앞부분.‘ 아(我) 대한(大韓) 동족 남매와 기아편구(우리 세계 만방) 우방 동포아. 아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아 자손 여민(黎民\일반 백성)에 세세상전(世世相傳)키 위하여 자(玆)에 이족전제(異族專制)의 학압(虐壓\학정과 압제)을 해탈(解脫)하고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고 적었다.
1979년 중앙대 영신아카데미에서 이 선언서의 사본을 처음으로 전시했던 김성근 한국학연구소 자료조사실장은 이 자료를 검토한 뒤 "종이의 재질과 왼쪽 가운데에 찍힌 도장의 상태 등을 보아 광복 이전의 원본이 분명하다"며 "원본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본지 확인 결과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것은 재일 학자 강덕상씨가 소장한 마이크로필름을 복제한 것이었고, 이화장(梨花莊)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에도 원본은 없었다.

김연갑 이사는 "작고한 소장자는 일제시대 간도로 이주해 이 선언서를 입수한 뒤 1920년대 초 독립자금 영수증과 함께 벽지 속에 숨겨 놓았는데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에야 다시 꺼낼 수 있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그의 아들은 한국에 이 선언서가 필요한 기관이 있다면 양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 '대한독립선언서'는 누가 왜 선포한 것일까? 선언서의 주인공들은 당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망명 독립운동가들이다. 학자들은 작성자가 훗날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이 되는 조소앙(趙素昻·1887~1958) 선생이며 선언의 실질적 주체는 길림성의 대한독립의군부라고 본다. 서명자로는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좌진, 박용만, 박은식, 신채호, 안정근(안중근의 동생), 안창호,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상룡, 이승만, 이시영, 조용은(=조소앙) 등 당시 해외에 있던 대표적인 저명인사들이 참여했다.
서지학자 김연갑씨가 처음으로 발굴된‘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의 원본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선언문의 내용은 '기미독립선언서'보다 훨씬 강경하다. '아(我) 대한(大韓) 동족남매(同族男妹)와 기아편구(�E我遍球·우리 세계만방) 우방동포(友邦同胞)아'로 시작하는 선언문은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대한 민주(民主)의 자립'을 선포했다.

이어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無道), 무력·폭행에 의한 것'이라며 한일병합의 무효를 선언하고,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마지막에는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라며 일본에 대해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밝혔다. 이 때문에 4000부가 배포된 것으로 알려진 이 선언서의 목적이 무장독립 노선을 촉구하는 데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김기승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해 "무장투쟁론에 가까울 정도로 전투적 입장을 지니고 있는 독립선언서"라며 "당시의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생각은 '기미독립선언서'에서 나타난 국내 지도자들의 평화적인 노선과는 크게 달랐다는 것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1918년 11월(또는 1919년 2월) 선포된 최초의 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의 원본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중국 동포로부터 이 자료를 건네받은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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