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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하늘에 이승만은 없었다 201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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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원/대한민국원년(1919) 10월 11일 - 아랫줄 맨 오른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현순]
1919년 상하이에 밀파되어 평화회의의 주창자인 미국 대통령 T.W.윌슨과 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청원서를 보냈다. 상해에서 3월 1일 만세운동이 벌어진 것을 듣고 3월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안창호에게 전보를 보내 재미교포들이 처음 만세운동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파리와의 통신연락을 담당하고 미국에 있는 교포들에게 독립운동의 현황을 알려 주었다. 그는 임시정부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여하였으며, 제2회 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외무위원에 선임되었고 후에 다시 내무차장이 되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자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가 구미위원회 위원장 대리직을 맡았으나, 독단적으로 주미대사관 설치를 결정하고 건물을 구입하고 미국 정부에 대사관 건립에 대한 통고를 보내는 갑작스러게 일처리를 하여 무리를 일으켰다. 이승만은 상해에서 전보를 받은 즉시 파면시켰으나 현순은 이에 복종하지 않았다. 이로 구미위원회는 신망을 잃고 모금의 구심점을 잃게 되었다.

1919년 9월 7일 임정 내무차장으로 비밀리에 만주 출장을 다녀왔다.[1] 1920년 9월 23일 임정 내무차장으로 비밀리에 출장을 다녀오다.[2]

그는 다시 상해로 돌아와 1922년 상하이의 임시의정원과 좌일계열의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안창호·이시영·김구 등과 같이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좌우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한겨레신문, 1999.4.10자]
'이승만, 3.1운동 외면하고 신탁청원'

이승만이 미국에 신탁청원을 한 날짜는 이승만이 주장하는 1919년 2월 25일 이 아니라,
3.1독립선언 이후인..1919년 3월 16일 이다. (현순, 워싱턴외교문건에서 발췌..)

자신이 3.1독립선언 이전에 사전 준비 및 기획에 기여한 것처럼..
역사적 사실을 거짓으로 조작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승만은 3.1운동이 일어난지도 몰랐고, 아울러 독립운동을 한 사실 자체가 없다.
3.1독립선언에 이어 6월까지..(200만명 참가) 국내외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짓고 있는데,
이승만은 뒤늦게 3.1독립선언 소식을 듣고..1919년 4월 14일 미국(하와이)에서 '미주한인대회'를 연 것 이 고작인데..

어찌 그런 이승만이 191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원장 이동녕)에서 국무총리에 추대된 것도 모자라서..대한민국 초대대통령으로 추대를 받았다고..미국은 물론, 세계각국에 주장하는지 황당할 뿐이다.
확인해본 사실에 의하면.. 이승만은 1919년 6월 18일 일본국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President of Republic Korea'라고 하여..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으로 공식추대된 손병희의 공직을 사칭하고 다닌 것은 이제 역사적 사실이 되고 말았다.
의암손병희 선생이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순국할 때까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을 무렵에도..
그는 태연하게 대통령 행세를 하고 다녔다니..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넋을 잃고 있던던 당시 국민들은 그저 황망했을 것이다.
100년 전이나..오늘이나..대한민국에 과연 정의가 살아있는 것일까?

*UIRI*

[자료출처]
- 현순문건 폭로, 한겨레신문, 1999.4.10자.
- KBS다큐(20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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