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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의암경영론(요해) 2012-06-30
<의암경영론> - 요 해 - 1. 머리말 의암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한 정치가이자 천도교 대도주로서 대한민국의 성립을 영도하였다. 그의 철학은 일원화·대중화·비폭력화로 대표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한 천도교 포덕은 대한민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의 업적 중 그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대한조선의 자주독립국임과 대한국민의 자주민임을 천명한 3·1독립선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실패로 끝날 수 도 있었던, 거족적인 민족운동이자 그의 일원화·대중화·비폭력화정신이 살아있는 역사이다. 하지만, 정작 오늘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많은 국민들은 그에 대해 모르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김구 선생이 선정된 바 있다(동아일보, 1998.3.17). 그러한 김구 선생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의암 손병희’선생을 꼽았으니 의암이 얼마나 대한민국의 거목인지 알 수 있다. 천도교를 재창립하고,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살신성인의 책무를 수행하고, 세계사에 유래가 없을 만큼의 민주적이고 거족적인 3·1 운동을 이끌어낸 그의 리더쉽과 경영철학을 연구하고, 실천하고자 한다. 2. 의암의 경영철학에 대한 개요 의암 손병희는 1861년 4월 8일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나 22세때에 동학에 입교하여 교주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로서 수행하였다. 그는 당시 동학교도들을 교육하고, 대한조선의 정치·경제 개혁을 위해 道, 財, 言의 세가지 부문에 논하는 삼전론(三戰論)을 주장하였다. 1903년 당시에 대한조선 정부에 대하여 의정대신과 법무대신에게 삼정건의문을 보내어 보국안민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고 국민들을 일치·단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삼전론과 삼정건의문은 근본적으로 財, 道, 言으로 3가지 부문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여기서, 동학교도들을 개혁적인 주체로서 선도하고자한 三戰論과 건의문에서 제시한 三政論은 차이가 있다. 동학교도들에게 제시한 삼전론은 도전, 재전, 언전의 순서로 되어있으나 삼정건의문은 재정, 도정, 언정의 순서로 구성되어있다. 이는 그 목적에 따라 3가지 부문에 대한 중요성을 달리한다는 의미로서, 외세로부터 수탈이 심각하던 1903년 당시에 인재를 양성하는 것과 사상부재로 인한 국민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제자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부각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 삼전론 설법 동학(의암이 천도교로 재창건)의 등장배경을 살펴보면, 최제우는 관에 체포된 후 “洋學이 들어오는데 그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敬天之心’으로 열세 자 주문을 지어 東學이라고 했고, 그렇게 해서 陰인 洋學을 陽인 東學으로 제압하려 했다”고 하였다. 이를 볼 때 동학초기에는 우리의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고, 서양 또는 서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동학의 시각이 달라진다. 1901년 일본에 망명한 손병희는 동학농민운동 후 문명개화운동론의 확산의 영향과 개화인사와의 교류를 통해 문명개화사상을 갖게 된다. 이렇게 개화사상에 눈을 뜬 그가 1902년 지은 <三戰論>은 외세를 배격하는 데에서 벗어나 교류를 통해 실력을 양성하고, 조국을 근대화하자고 주장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1905년 12월 보다 고차원적인 통합의 의미로서 동학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꾼다. 그 후에 천도교단이 교리와, 교제와, 교인의 근대화를 추구하면서 서양을 문명국으로서 정치·경제·사회 등의 측면에서 모방의 대상과 이루어야 할 목표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 혹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천도교의 신앙과 이념이 서양의 종교보다는 개인·가정·세계에 확산되기를 희망하였다. 삼전론은 당시 시대적 영향을 받은 의암 손병희의 사상이 함축된 것으로서, 도전에서는 주체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국민의 통합(즉, 人和)을, 재전에서는 근대적 문물 및 서양의 기술로 만물을 다스려 실력을 쌓을 것을, 언전에서는 지혜와 계책을 통한 외교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 삼정상소문 삼정상소문은 1903년 8월 의정대신 윤용선과 법부대신 이윤용에게 국정개혁 건의안으로 건의한 것이다. 그의 삼전론은 무력전쟁의 대결을 눈앞에서 보면서 도전, 재전, 언전, 즉 사상전, 경제전, 외교전의 세 가지 전쟁을 들어 개화 자강의 국권개혁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상소문에서 그는 삼전론을 바탕으로 三政의 시급한 과제를 제시하지만, 삼전론과 달리 도전보다 재정을 먼저 언급하면서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재정에서는 농·상·공업을 진작하지 않으면서 외국물건만 사서 쓰는 것을 개탄하며 기술발전에 노력할 것을 권고한다. 두 번째로 도정에서는 나라에 주된 종교가 없어 국민들이 사상적으로 통일되지 못하며 선도하지 못해 和民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이에 그는 主敎를 정해 국민의 권리를 선양하고 일통할 것을 권고한다. 세 번째로 언정에서는 외국의 물정과 법률을 이해해 국제관계에서 대한민국의 입지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러·일 전쟁과 국제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한국에 대한 경제권의 침탈이 거세질 것으로 판단해 이에 대한 계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러한 그의 정세분석은 불행히도 옳았으나, 당시 의정대신은 妖言이라하여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3. 의암의 삼전론(요해) 가. 재전 의암 손병희는 첫 문장에 “재물이란, 하늘이 준 보배로운 물화이니 만민의 이용이다”라고 언급하며, 농업·상업·공업의 발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개화적 사상에 눈을 뜬 손병희가 일본에 피신한 당시 먼저 개화한 일본의 문물을 접하면서 그 실용성과 효용을 보았던 영향이다. 현대적 해석은 개방·대중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엘리트들 유학시키고, 개방을 통해 외국의 선진기술을 받아들이고, 이를 대중에게 보편화하여 경제성장과 부국강병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손병희가 지향했던 것은 부국강병으로서 단순히 기술발전과 삶의 풍요로움을 넘어서 외국의 침략을 방어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근본적으로 국가가 평화를 유지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경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지로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 사회에서도 국제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이 바로 경제력이다. 선말까지 사농공상의 보수적인 생각이 팽배하였음에도 의암은 농공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지금 세계로 말하면 인기가 매우 왕성하여 널리 경위를 살펴보아서 물리를 연구하여 이치를 미루어서 보기좋고 쓰기좋은 여러 가지 귀중품을 만들어 내니 이루 다 써내지 못할 것이 많은지라. 가령 색다른 종류의 물건으로서 일찍이 여러나라에 시험하는 것 같음은 저들의 만든 물건을 옮겨서 팔고자 함이라. 대개 이와 같은 즉, 혹여 미개한 나라가 있어서 이해관계를 분석할 줄 모르면 몇 해가 못 되어서 그 나라가 파멸하는 것을 미리 서서 기다릴 수가 있으리라.’라고 언급했다. 이는 의암이 ‘재’의 중요성에 대한 고찰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상황에 비추어 열강의 침략의 본질(시장개척)을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국제관계 속에서 대한민국이 소위 ‘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발전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당시 열강들은 선박·철도·광산 등 많은 이권들을 빼앗아가고 있었고, 이러한 이권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홀로 우매하다고 탄식하였다. 이러 점들을 볼 때 그는 근본적으로 독립을 위해서는 경제의 성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재전을 통해 농업·상업·공업의 발전이 없을 경우, 스스로 자립할 여건은 물론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재원이 없어, 결국은 침탈당하고 말 것을 경고한 것이다. 나. 도전 의암 손병희는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하여 어디까지나 도를 통해 백성을 화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백성의 마음을 화합함으로써 백성의 권리를 선양할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기틀을 다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그의 언급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심을 도덕으로 교화하고 화합함으로써 그 근본을 건전히 하여 나라를 건전히 하고자 하는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삼정상소문에서 ‘도정이란 주교를 이름이니 화민성속의 정책입니다. 나라에 주교가 없어 백성이 성품을 거느리지 못하고 각자 위심하므로 정법이 시행되지 아니하나니 이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나라에 도가 없이 흥성한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따라서 도전에서 말하는 도란, 주교로서 천도교를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당시 시대적 배경은 유학이 쇠퇴하는 반면, 서학(천주교), 불교, 천도교 등 여러 종교가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특히나 천도교는 급격히 세력이 확장되고 있어서 천도교가 주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926년 조선 종교 현황을 보면 불교인이 20만 명, 기독교인이 35만 명이던 데 반해 천도교인은 200만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손병희는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으로만 인식한 것은 아니며, 3·1독립선언에서 알 수 있듯이 의암 손병희는 종교를 뛰어넘는 통합을 지향했다. 평소 그가 말하던 일원화의 의미로서, 종교 간의 논쟁을 뛰어넘는 통합 또는 협력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어려운 시대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어떠한 지향점이나 구심점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도전에서 ‘힘으로써 다스릴 때는 비록 억만의 많은 백성이 있을지라도 각각 억만가지 생각을 갖지만 도덕으로써 교화할 때에는 비록 열 사람의 충성이나마 생각이 같고 덕이 같으리니 보국안민의 계책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언급했다. 이는 힘의 정치가 아닌 道(사상)을 통한 정치를 지향하고 정신무장을 통해 외세에 대항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점과 그가 언전에서 ‘言’을 민의를 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까지 고려해볼 때, 그가 궁극적으로 의도했던 것은 천도교가 국민들에게 교화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또한 애민사상을 기본으로 하는 민주적 형태의 정치구조를 바라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 언전 의암의 언전은 단순히 언어의 기능(의사표현수단) 뿐만 아니라, 교제(외교)의 수단, 지모를 모으는 수단으로서 서술하고 있다. 언어에 대해 ‘말이란 것은 속에 쌓여있는 뜻을 드러내는 표준이다’, ‘사실을 서술하는 기본이다’라고 언급하며 말을 기본적인 기능을 고찰하면서 ‘언어의 통섭이 없다면 어떻게 교제의 방책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서술했는데, 이는 서양과의 교류를 위해 서양의 언어를 배울 필요성에 대해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가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가 서로 어울려 있는 가운데 언어의 통섭이 없다면 교제의 방책을 찾기 어려움을 설파하며 언어를 통해 화합하고 서로의 뜻을 함께하는 방안을 논하였다. 실지로 의암은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나 서양의 기술과 법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뛰어난 청년들을 선발하여 유학을 보내는가 하면, 직접 일본어도 배워 외국을 문물을 배우고자 하였으며, 또한 외국의 선진하되 행정·법률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또한 그는 ‘천연적 경제’라는 설교를 통해 교육구국의 이념을 세웠다. ‘우선 시급한 것은 나라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리고 인간생활은 경제로 유지하는 것인데 경제에 착념이 없으면 한 가정도 국가도 살림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사람이 말하는 이러한 경제보다 특별한 경제를 말하고 싶은데 그것은 즉「천연적 경제」를 말하는 것이다. 천연적 경제란 지하자원이나 자연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 한 개인에게는 한푼 이익도 없는 것이나 이 천연적 경제가 없으면 세상 사람이 말하는 저 경제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천연적 경제가 무엇이냐 하면 사람은 일생일사가 정한 이치인데 죽을 때에 자손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죽기전에 평상시에 그 자손을 대하여 바른 사람이 되도록 좋은 말을 들려주어 효유하는 것을 나는 천연적 경제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국가가 있어야만 교육도 경제도 필요한 것이라 논하고 경제도 일반적인 의미의 경제보다도 교육을 통해서 획득되는 경제 즉 천연적 경제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 말로써 나라를 흥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옛 성인의 심범이 서적에 나타나 있나니 단연코 환장의 솜씨가 물상에 나타남과 다름이 없나니라’라며 언급했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나아가 언전에서 ‘言’에 대해 智謀의 의미로서도 해석하는데, 외세의 침략에 대한 계책을 수립하여야 한다고 한다. 또한 의암은 ‘언’을 민의로 보아, 이를 모아 오늘 날의 국회와 같은 기능을 하는 민회를 구성하고자 제안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시대상황에 적응하는 한편, 백성이 주체(그의 인내천 사상이 반영된 듯하다)가 되는 정치구조를 희망한 것으로 보인다. 4. 맺음말 의암 손병희의 삼전론과 삼정상소문을 살펴보건대 그 내용과 함축된 의미는 평소 그가 말하던 일원화·대중화·비폭력화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재전을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희망하고, 도전을 통해서는 국민들이 서로 和하며, 국민들을 근본으로 삼고, 그 권리를 선양하고자 한다. 그리고 언전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내적으로 국민들을 의견을 수렴하는 현대적 민주정치구조 또한 희망한 것이다. 이렇게 각자이심(서양의 이기주의)과 갈등이 없는 통합된 정체성을 가진 사회 즉 일원화된 사회,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중심의 평등)사상을 기본으로 국민들이 주체가 되는, 즉 권력이 대중화(민주화)된 사회, 그리고 모두가 和하여 갈등이 없는, 비폭력화(넓은 의미의 비폭력이란 서로 화합한다는 평화를 상징)된 사회가 그가 꿈꾸던 사회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과 역사가 서술하고 있는 의암 손병희는 천도교 교주로서의 종교지도자 또는 3.1독립선언 대표 정도이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의암은 단순히 종교가나 독립운동가로 평가함에 더하여, 적어도 한국 근․현대사 1세기를 종교의 최고지도자겸 정치가이면서 준비된 교육자로서 자신의 시대적인 역할을 배우고 깨우친 안목 있는 최고경영자이고, 자신의 모든 경영철학과 역량을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적인 국가의 성립을 목적으로 설정해서 살신성인으로 실천한 위대한 경세가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의암손병희 선생의 국가경영철학을 배우고 실천하자는 것입이다. *의암경영연구소(UIRI)*
 
  김병로,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 고문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UIRI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