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평론가
역사서에서 경제 분야를 기록한 부분이 식화지(食貨志)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서 비롯되었다. 『한서』 ‘식화지’는 홍범(洪範) 팔정(八政)을 설명하면서 첫 번째는 식(食)이고 두 번째는 재화(貨)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고대에도 경제 문제를 중시했다는 뜻이다.
『한서』의 이런 서술 체제를 본떠 ‘식화지’를 둔 역사서가 『고려사(高麗史)』다. 세종~문종 연간에 편찬된 『고려사』 ‘식화지’에는 고려 말의 토지제도를 비난하는 대목이 많다. “요즈음 들어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州)보다 크며, 군(郡) 전체를 포함하여 산천(山川)으로 경계를 삼는다”는 대목도 있다. 한 집안 소유 농지가 한 주보다 크다는 것이다. 소수가 거대한 토지를 과점(寡占)하면 대다수 농민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
『고려사』 ‘식화지’에는 간관(諫官) 이행(李行) 등이 호강(豪强)한 무리들은 끝도 없는 농지를 차지했지만 “소민(小民)들은 일찍이 송곳 꽂을 땅도 없어서(曾無立錐之地) 부모와 처자가 다 굶주리고 서로 헤어졌으니 신 등이 심히 애통합니다”라고 상소한 내용도 있다. 『고려사』 ‘신돈(辛旽)열전’은 “(노비로 전락한) 백성들이 병들고 나라가 여위게 되었으며, 그 원한이 하늘을 움직여 수해와 가뭄이 끊이지 않고 질병도 그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고려 전체의 재화(財貨) 생산량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소수 권세가가 재화를 과점(寡占)하면서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을 움직여 나라가 망할 지경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판도판서(版圖判書) 황순상(黃順常) 등이 상소를 올려 “식량을 족하게 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는(足食安民之道)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데 있을 뿐입니다”라고 주장하고, 우왕(禑王)이 재위 14년(1388) “근래 호강한 무리들이 남의 땅을 겸병해 토지제도(田法)가 크게 무너졌다”면서 그 폐단을 구하는 법을 반포한 것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왕조가 붕괴될 위기임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