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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8 독립선언(동경), 손병희 작품 2012-06-21

1919년 2.8 동경학생 독립선언은 준비된 거사 였다.
이를 추진한 최팔용 등 실행위원 중 송계백이 국내 미리 잠입..
(기려수필에 따르면..1918년 15월 모 일 비밀회의를 가진 것으로 확인)
당시 고려대학교(옛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장 최린(손병희의 참모),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
선배 현상윤선생 등을 만나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비밀모의한 후 손병희 선생의 승인하에..
철저한 보안속에 자금 지원을 받아..
독립선언서 초안의 인쇄물을 만드는 등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하고 실행한..
전민족을 망라하여 합의된  3.1독립선언을 위한 전위대로써 막중한 역할을 한 것이다.

최초의 독립선언이라고도 하고..
음력으로 무오년이라 하여 무오독립선언으로 명명되기도 한..
1919년 2월 1일의 독립선언서의 문장, 2.8독립선언은 문장과
위대한 3.1독립선언서의 완결판 선언문장도 이를 기획 추진한..
이면지도자 총수 손병희 선생지휘 하의 오세창, 권동진, 최린, 송진우, 신익희, 김규식 등의..
애국선열들의 치밀하게 짜여진 합작된 기획작품이란 것을 밝힌다. 

*의암경영연구소*




[위키백과]

송계백(宋繼白, 1896년 ~ 1920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생애) 평안남도 평원 출생이다. 보성중학교를 1915년에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와세다 대학 학생으로 있던 1919년,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도쿄에서의 2·8 독립선언에 9인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그해 1월부터 개최된 파리강화회의로 국제정세의 변동이 예견되던 가운데, 1918년 말부터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독립 운동 실행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들은 송계백을 비롯하여 최팔용과 김도연 등 11명의 실행위원을 선임하여 독립 선언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1919년 1월초에 이들 유학생 대표로 국내에 밀파되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는 활자와 운동 자금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선언서를 비단조각에 써서 이를 학생복 속에 바늘로 꿰매어 숨기고 국내에 잠입한 뒤 보성중학교 교장인 최린과 1년 선배인 현상윤을 통하여 최남선, 송진우 등을 만나서 거사 계획을 알리고 논의했으며, 정노식에게서는 운동 자금을 협조 받았다.

2월 8일 오후 2시에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송계백을 비롯한 선언서 서명자 9명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금고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금고 7개월 15일형을 언도 받고 복역 중 이듬해 초에 25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구글]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공부했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와 상하이·미국에서의 한국독립 요구를 보도한 〈저팬 애드버타이저〉의 기사에 크게 자극받은 재일 유학생들은 12월 29일과 30일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웅변대회와 망년회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1919년 1월 6일에는 도쿄[東京]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 최팔용(崔八鏞)·백관수(白寬洙)·김도연(金度演)·서춘(徐椿)·이종근(李琮根) 등과 함께 임시실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최근우(崔謹愚)와 함께 완성된 초안 1부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가 최린·송진우·현상윤·최남선 등과 만나 유학생들의 계획을 알리고 이를 공동으로 추진할 것을 협의한 후 정노식(鄭魯湜)으로부터 받은 보조금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거사준비를 했다.

[참고자료, 기려수필에서..]
 1918년 12월 25일 최린은 의암 손병희선생의 총지휘 아래..오세창, 권동진, 송진우를 만나서..
 독립운동을 기획하고 추진하기로 보고하였고, 보고를 받은 손병희 선생은 대찬성하였고..
 최린보성학교 교장 등을 통해 학생들에게 자금지원을 지시함.

*의암경영연구소 제공*


[2·8 독립선언서]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의 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 … 우리 민족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 아래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하였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때에 당연히 이의 광정(匡正)을 세계에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오늘날 세계 개조의 주역이 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지난날 자기들이 솔선하여 승인한 잘못이 있는 까닭으로, 이 때에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할 의무가 있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또 합병 이래의 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밝혔던 우리 민족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대하는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습용(襲用)하여 우리 민족에게는 참정권과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을 불허하며 심지어 신교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도 적지않이 구속하며 행정·사법·경찰 등 여러 기관이 다투어 조선 민족의 사적인 권한까지도 침해하였다. … 어느 방면으로 보아도 우리 민족과 일본과의 이해는 서로 배치(背馳)되며 항상 그 해를 보는 자는 우리 민족이니,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의 생존할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노라. … 우리 민족에게는 한 명의 병사도 없다. 우리 민족은 병력으로써 일본에 저항할 실력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 우리 민족은 구원(久遠)히 고상한 문화를 지녔으며, 반만년 동안 국가 생활의 경험을 가진 민족이다. 비록 다년간 전제 정치 아래에서 여러 해독과 경우의 불행이 우리 민족의 오늘을 이르게 하였다 할지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 새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건국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할 수 있게 될 줄로 믿는 바이다. 이미 우리 민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게 민족 자결의 기회를 부여하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不然)이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이로써 독립을 기성(期成)할 것을 선언하노라.
1919년 2월 8일 재일본동경 조선청년독립단


[김상웅 칼럼]
1919년 1월 6일 ‘학우회’는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었다.
국제정세를 논하면서 지금이 조선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라고 열변을 토하여 장내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고, 2.8독립선언의 씨앗을 뿌렸다.

2.8독립선언 주도자의 한사람인 김도연의 회상을 들어보자.

때가 때인만치 이 웅변대회에는 4,5백명에 달하는 많은 학생들이 내청하여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그들의 면면에는 조국광복운동에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결심이 넘친 것으로 보였다.
연사로 나선 서춘, 이종근, 윤창석, 김상덕씨 등은 “세계 사조에 따라 또한 민족자결의 대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은 반드시 자주독립을 획득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숭고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우리 젊은 학생들이 앞장을 서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고 불을 뿜는듯한 열변을 토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 혈기의 학생들은 흥분되어 있던 참에 한층 더 울분이 가촉된 것이다.
이때 장내에 운집했던 유학생들은 당장 일본을 쳐부실 기세를 보였고 그 긴장된 분위기는 얼마동안 계속되었다.

흥분과 긴장이 쌓인 장시간의 강연회는 끝났으나 학생들은 해산할 줄도 모르고 새벽 1시가 넘도록 숙의를 거듭하였다. 그중에는 곧 독립운동에 대한 방안을 결정짓자고 주장하는 급진론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급히 서두르면 안 된다고 신중론을 들고 나오는 학생들도 있어서 이렇다할만한 결론이 나오지 않으므로 나는 이 자리에서 “이처럼 왈가왈부만 하다가는 끝이 없으니 우선 이 운동을 추진시킬 대표를 뽑아 독립운동에 대한 모든 문제는 이 대표들에게 일임하고 일단 해산하는 것이 어떠한가?”고 제의했더니 만장이 찬동하여 11인의 대표를 뽑은 후 새벽 2시가 넘어서야 해산하게 된 것이다.

이 때 대표로 뽑힌 11인의 인사들은 최팔용, 백관수, 윤창석, 서춘, 김철수, 김상덕, 이광수, 송계백, 이종근, 최근우, 김도연 등 열 한 사람이 선출된 것이다. (주석 2)

다음은 2.8독립선언 당시 일본은 유학생이었던 최승만의 증언이다.

12월 하순인줄 안다. 날자는 분명히 생각나지 않지만 역시 우리사람들이 YMCA에서 웅변대회를 갖게 되었다. 때가 때니 만치 많은 학생들이 모여 회관에는 빈자리가 없이 꽉 찾을 뿐만 아니라 주위에는 선 사람도 많았었다. 모두들 긴장된 얼굴로 열심히 연사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계획적으로 힘있게 말잘하는 서춘, 이종근, 김상덕, 윤창석 등에게 민족자결의 원칙 아래 우리 민족도 반드시 자주독립을 획득해야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함에는 우리 유학생들이 앞장서서 결사의 의기로써 용감스럽게 나가야 될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게 하였다.

만장의 학생들도 몹시 흥분되었다. 열띤 박수와 옳소옳소하는 소리가 많은 사람에게서 일어났다. 예정된 연사들의 말은 끝났건만 학생들은 해산할 줄을 모르고 밤이 깊도록 앉아서 독립운동 방안에 대하여 말이 오가고 하였다. 그러다가 몇 사람의 위원을 뽑아 이들에게 이에 관한 일을 위임하기로 하였으니 즉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윤창석, 서춘, 김철수, 이종근, 이광수, 송계백, 최근우, 김상덕 등이었다. 만장일치의 박수로 찬동하고 웅변대회는 산회되었다.

선출된 대표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이곳 저곳에서 비밀히 모여 의논을 하곤 하였는데 2월 8일까지 이르는 동안 모든 계획하는 바가 누설되지 않고 원만히 진행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주석 3)

김상덕은 웅변대회의 연사와 2.8독립선언을 주도하게 되는 11인의 실행위원으로 선출될 만큼 일본 유학생 사회에서는 신뢰와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표로 뽑힌 김상덕 등 실행위원들은 비밀리에 몇차례 모임을 갖고 거사에 관해 논의를 거듭하였다. 이들은 ‘학우회’나 ‘유학생친목회’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데 뜻을 모으고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발표하기로 하였다.
이들 문건은 상해에서 일본에 온 이광수가 초안을 작성하기로 하고, 영문과 일문의 번역도 그에게 맡겼다. 이들 문건의 인쇄는 백관수에게 맡기고 최팔용은 본국으로 파견될 학생을 선정하는 일을 맡았다.

일은 극비속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영문은 타이프라이터로 찍었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은 일문과 국문으로 YMCA에서 빌은 등사판으로 유학생 김희술(정칙영어학교 학생: 22세)의 방에서 등사하였다. 그리고 일본국회에 제출할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는 도쿄시내의 이토 인쇄소에서 인쇄하였다. (주석 4)

<선언서>와 <결의문>은 각각 600매, <청원서>는 1천매를 인쇄하였다. 서명자는 학생대표 중에서 11명이 선정되었다. 중형을 각오하고 대표에 뽑힌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재일본 동경 조선 청년 독립단 대표

최팔용(와세다대학생), 백관수(정책영어학교학생), 윤창석(청산학원학생), 서춘(동경고사학생), 김철수(경응대학생), 김상덕(무직), 이광수(와세다대학생), 송계백(와세다대학생), 이종근(동양대학생), 최근우(동경고상학생), 김도연(경응대학생).


김상덕이 ‘무직’으로 기재된 것은 서명당시 학비 등의 이유로 대학에서 휴학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초 실행위원으로 선정된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이광수와 김철수가 추가되었다. 실행위원들은 1월 7일 청년회관에서 약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준비사항을 보고하고 동의를 얻었다.

이제 결행만이 남았다.
2월 8일 오전에 완성된 <선언서> 초안 한 부는 송계백과 최근우가 비밀리에 국내로 반입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청원서>는 우편으로 동경주재 각국 대사관, 공사관과 일본정부의 각 대신, 일본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발송하였다.

2월 8일 오후2시, ‘학우회’ 임원선거회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소집한,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역사적인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중국으로 떠난 이광수를 제외한 실행위원 10명을 비롯하여 600여 동경유학생 거의 전원이 참석했다.


주석
2> 김도연, <나의 인생백서>, 69~70쪽, 상산회고록출판동지회 간행, 강우출판사, 1967,
3> 최승만, <2.8독립선언과 관동진재의 실상과 사적 의의>, 8~9쪽, 2.8독립기념관설치위원회 발간, 1984.
4> <현대사자료> 26, 21쪽, 김성식, <일제하 한국학생독립운동사>, 48쪽, 정음사, 1977.





 
  독립운동과 시대정신(이종찬)
  김병로,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