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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학혁명을 이끈 손병희 통령 2014-08-27

오는 10월 11일(토, 음력 9월 18일)는 동학혁명이 일어난지 120주년 되는 날이다.

아! 동학혁명~
동학, 천도교를 신봉하시는 분들조차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지만..
19세기 후반의 조선에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었기에 농민..이라 말할 것이며,
동학의 2세교주 최시형 주도하의 광화문 복합상소를 비롯한 신원운동의 과정과 결과에 기인하여
1894년 9월 18일 동학교도들의 총기포 명령으로 손병희 통령(최고사령관)의 지휘하에 혁명이 시작되었으니..
의당 동학에 의한 혁명이라 말해야 하며, 500년 전제군주의 포학 및 부패에 시달리고 서양의 침략 정책과 함께 청국과 일제를 끌어들인 조선정부의 썪어빠진 사대주의를 타파하는..
'척왜양창의'란 깃발 아래 백성들의 깨우침과 민주적인 정치를 갈망하고자 일어난 것이..동학혁명이다.

세계역사상으로도 유래가 거의 없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혁명!
오천년 역사의 한국인인 깨어있었던 지식을 갖춘 동학인들을 중심으로한..
백성이 중심이 된 위대한 민주혁명이었다고 자리매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학혁명 경과) 혁명의 좌절 이후 북접(북접대도주의 약칭)의 지도부(최시형, 손병희)는 지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조직재건작업을 시작했으며, 손병희는 1896년 1월 손천민·김연국과 함께 최시형으로부터 각각 의암·송암(松菴)·구암(龜菴)이라는 도호를 받고 교단재건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동생 병흠(秉欽)과 함께 이북지역의 개항장 부근이나 국경 근처의 상업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를 비롯한 손병흠·이용구(李容九) 등의 포교 결과 황해도·평안도에 새로 형성된 포(包)·접(接)의 두령들이 늘어났으며, 이들은 1897년 4월 최시형에게 신 접주로 정식임명장을 받았다. 손병희가 개척한 지역의 교도들이 증가하여 그들로부터 거둔 미곡(米穀)이 중앙교단의 기본 활동 유지비의 재원을 이루었으므로 최시형은 새로이 교세가 확장되어가고 있는 관서지역에서의 포교활동을 중요시하고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1897년 북접대도주가 되었으며 1898년 최시형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자 동학교문을 통솔하게 되었다. 1900년 풍기에서 거행된 설법식에서 스스로 북접의 법대도주(法大道主)가 되어 김연국을 신도주(信道主), 손천민을 성도주(誠道主), 박인호를 경도주(敬道主)로 삼고 교문의 종주(宗主)의 지위를 확립했다.

추후, 의암손병희 선생의 국가경영전략에 의해 이루어지는
1919년의 위대한 3.1독립선언에 이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의 수립은 동학혁명에 그 뿌리가 있었다.
동학혁명-3.1독립선언-대한민국은 의암손병희 성사라는 위대한 살신성인의 지도자가 있었기에 성공했으며,
오늘 풍요한 대한국민 우리들이 살아있는 자랑스런 민주주의의 역사임이 틀림없다.

돌아오는 10월 11일, 동학혁명 120주년을 기념하여..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는..선생님의 독립과 광복정신을 승계하는 후학의 육성을 위해..
제2회 손병희(어린이)글짓기 대회를 서울시청에서 개최하고자 한다.

 
  광복절, 의암성사님!
  의암 손병희 선생님 유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