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완전 하다면(2) -의암 손병희 | ||||||||||||
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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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로 돌아온 선생은 독립정신을 일깨우려면 먼저 백성의 교육이 시급함을 깨닫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와 동덕여대를 인수하고 교육사업을 한다. 1919년 3월 1일 만해 한용운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필두로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파고다 공원에서 모여독립 선언을 하기로 하지만 갑자기 장소를 태화관으로 바꾼다. 파고다 공원에 대규모 학생과 민중들이 모이면 일본의 가혹한 탄압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한 손병희 선생은 조금이라도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장소를 태화관으로 바꾼 것이다. 손병희 선생은 태화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하다가 1년 8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출감하게 된다. 그러나 1922년 61세로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된다.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는 손병희 선생이 태어난 생가와 영당, 그리고 동상과 기념관이 있다. 원래는 터만 남아있었지만 청원군에서 1971년 생가를 복원해 놓았고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천도교에서 동상을 세웠다. 의암기념관에는 3·1운동 당시의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하는 모습을 이해하기 쉽도록 디오라마로 구성해 놓았다. 그리고 3·1운동과 손병희 선생에 대한 영상을 짤막하게나마 8분정도 볼 수 있다. 3·1운동이 일어난 직접적 계기가 무엇인지, 비폭력 대중화 단일화로 시작되었던 운동이 왜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폭력화가 되었을까. 그리고 3·1운동 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해설을 통하면 더 이해가 빠르고 재미있는 관람이 기다리고 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는데 안중근은 왜 의사로 불리고 유관순은 열사로 불리는지 의사와 열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유적지와 유허지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지 않은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기념관을 만들고 생가를 복원해 놓았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이 별로 없어 해설사의 한 사람으로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3·1절이 돌아오면 행사를 하고 보훈의 달이나 다가오면 그나마 학생들이 찾아올 뿐 그야말로 적막감만 감돌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학교 교육의 책임도 없잖아 있다. 3·1운동은 우리민족 스스로가 일궈낸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이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는 수 많은 독립 투사들이 오로지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가시밭길을 걸어왔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손병희 유허지에 근무할 때면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손병희 선생님께서 태어날 당시 서자가 아닌 적자로 태어나서 사회의 불평등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불평등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던 중 만난 동학이 선생에게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고 싶은 목표가 되었던 것 아닐까. 바로 본인이 꿈꾸고 갈구하는 동학이 삶에 힘이 되고 용기가 되었으리라. 그래서 꿈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사람의 크기를 만들고 시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목표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가이며 종교지도자로서의 좋은 본보기가 될 손병희 선생은 자신의 처지를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생각한 인물 중 한 분이다. 손병희 유허지에 와서 해설을 들은 사람은 3·1운동하면 이젠 손병희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으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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