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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승만에 엮여서는 곤란.. 2015-11-08

“아비는 이승만과 한몸으로 엮이고 싶지 않구나”

등록 :2015-11-06 08:43수정 :2015-11-0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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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이승만, 김구
박정희, 이승만, 김구
박정희가 박근혜에게 보내는 가상의 편지
“독재자 비판에 할 말 없단다” 공칠과삼 평가에 만족
 편집자주 : 박근혜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어떻게 바라볼지, 가상의 편지로 꾸며봤다. 편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저서와 노태우 전 대통령 회고록,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 김계원의 자서전 등을 토대로 작성했다.

사랑하는 내 딸 근혜 보아라.

아무리 아비와 딸 사이라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도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나와 무관치 않다고 하니 모른 척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참에 도올 김용옥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 가슴을 찌르고 들어오더구나. “내 자식이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나를 올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면 미친놈이라고 그럴 것”이라는 말 말이다.

네가 국정화를 추진하는 이유가 내 명예회복을 위해서라고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더구나. 설마 싶었는데 “아버지가 하신 일에 대한 왜곡과 잘못된 인식을 바로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아무런 보람도, 의미도, 기쁨도 있을 수 없다”는 네 과거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니 영 허튼 소리도 아닌 듯하다.

난 네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엄마 역할을 대신하는 게 애처롭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너를 대하기가 사실 편하지만은 않았단다. 1978년 정초 식사자리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날밤 한 개를 집어 ‘이것 참 맛있겠구나’하며 너에게 줬는데 네가 받지 않더구나. 순간 분위기가 어색하게 흐르자 옆에 앉았던 둘째 근영이가 ‘아버지 저 주세요’하고 받아선 입에 넣어 깨물어 먹은 적이 있다. 그 자리에 노태우라고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가 함께 했는데, 훗날 회고록에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참으로 외롭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적었더구나. 거참. 그 친구 물렁물렁하게 봤는데 눈썰미 하나는 제법 날카로웠던 모양이다. 또 가끔씩은 혹시 깨어 있으면 말이라도 붙여볼까 하고 네 방 앞에서 조용히 서성거리며 엿보기도 했단다. 하지만 곤하게 잠들어 있어 깨우지도 못하고 그대로 다시 침실로 돌아오고는 했다. (박정희 마지막 비서실장 김계원 회고록 <더 파더(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1977년 8월 당시 부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서예 연습을 받고 있는 24살 박근혜의 모습.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1977년 8월 당시 부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서예 연습을 받고 있는 24살 박근혜의 모습.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그런데 네가 나를 그리도 끔찍이 생각해준다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하지만 말이다. 그 길이 진정 나를 위하는 건지 다시 한 번 생각해줬으면 좋겠구나. 문재인이라는 야당 대표가 걸핏하면 ‘친일, 독재’를 입에 올리던데, 교과서 국정화가 오히려 그 사람 말을 거들어주는 꼴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친일 문제만해도 그렇다. 네가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얘기하니, 뉴라이트 쪽은 신이 났더구나. 교과서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버젓이 들고 나오고,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 친일파를 감싼 이승만을 영웅으로 미화하더라. 분명히 말하건대, 아비는 이들과 한 몸으로 엮이고 싶지 않다. 난 고관대작으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도 아니고 독립지사들을 때려잡은 민족반역자도 아니다.

혹여 이정희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던 충성 혈서나 다카키 마사오가 마음에 걸리는 게냐. 그래 인정하마. 하지만 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남들보다 좀 더 출세하고 싶었던 식민지 청년이었을 뿐이다. 친일파라 해도 그저 삼류에 불과했다. 해방되기 전 한 1년 동안 만주군 보병8단에 근무하면서 모택동의 팔로군과 맞섰으나 단장 부관으로 일했기 때문에 팔로군과의 총격전에는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인들이 주도했던 동북항일연군은 이미 한참 전에 소련령으로 피신했기에 동족의 가슴에 총을 쏠 일은 아예 없었단다. 한참 내 행적을 조사하던 진보 쪽 사학자들도 대개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니 마음을 놓거라.

난 또 김무성이라는 여당 대표가 국정화에 앞장 서는 것도 영 마뜩치 않구나. 국정화 싸움을 자꾸 키워서 자신의 아버지 김용주의 친일 행적마저 은근슬쩍 묻어버리려는 속셈으로 읽힌단다. 너하고 사이가 좋지 않다니 ‘아버지’를 매개로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용주와 나 박정희는 엄연히 다르다. 그는 일제 때 ‘귀여운 자식이 야스쿠니 신사에 모시어질 영광을’ 누리라고 식민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몬 사람이다. 군용기 헌납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어찌보면 난 그런 사람들의 달콤한 말에 혹해서 사지로 뛰어든 ‘부나방’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독재자’라는 비판에는 아비가 할 말이 없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리를 한 게 사실이다. 다만 국정교과서를 쓰게 될 뉴라이트 식으로 미화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단다. 그쪽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과 나를 한 묶음으로 엮어서, 우파의 정통성을 받쳐주는 두 기둥으로 엮으려 들 것이다. 그러나 난 이승만 그 노인네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비는 52년, 60년, 61년 이렇게 세 번 쿠데타를 기도했는데, 앞 두 번은 이승만 정부를 엎어버리기 위해서였다.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이 귀국하고 싶어했지만 그걸 끝내 거부한 것도 나다. 아비가 쓴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을 읽어보아라.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부패한 자유당 관권 중심의 해방 귀족” 등의 표현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친일파, 이승만과 얽힐수록 이름만 더러워질 뿐이다. 설령 아비가 이들과 연관이 있더라도 단연코 숨기고 잘라버려야 할 일이다. 그들 쪽으로 아비의 등을 자꾸만 떠밀지 말기 바란다.

리콴유(왼쪽 둘째) 전 싱가포르 총리가 1979년 방한했을 당시 박정희(가운데) 전 대통령과 찍은 기념사진. 맨 왼쪽은 당시 통역을 맡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한국정책방송원 제공/뉴시스
리콴유(왼쪽 둘째) 전 싱가포르 총리가 1979년 방한했을 당시 박정희(가운데) 전 대통령과 찍은 기념사진. 맨 왼쪽은 당시 통역을 맡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한국정책방송원 제공/뉴시스
나는 내 잘못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보릿고개를 넘게 해 준 대통령이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단다. 등소평이 모택동을 평가하면서 ‘공칠과삼’이라고 했다는데 우리 국민들도 나를 그렇게 평가한다고 믿고 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고 그걸로 족하다.

그런데 네가 욕심을 내서 나를 우상으로 떠받들려고 한다면 괜한 긁어부스럼이 될 게 분명하다. 지금이야 네 인기가 상당하다지만 단임제 대통령의 말년이라는 게 얼마나 허망한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2017년 11월이면 내가 태어난 지 100년이다. 기념식에서 내 영정 앞에 국정 교과서가 받쳐지면 뭘 하겠느냐. 그때쯤이면 아마 여당의 대통령 후보도 너를 밟고 넘어서려고 할 것이다. 그놈의 교과서 때문에 같은 편끼리 ‘친일, 독재 세력의 후예’라고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와 나는 함께 ‘불행한 부녀’가 되는 게다. 

나야 이미 이승을 떠난 몸이니 아무런들 상관이 없다만 못난 아비 때문에 네가 괜한 고생을 사서 하게 될까봐 걱정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딸아, 제발 도올이 한 이 말을 꼭 기억해주기 바란다. “역사적 평가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지금 박정희 대통령을 그대로 놔두면 놔둘수록 그 위상이 높아질 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평판 때문에 이런 편지를 띄우는 게 아니란다. 아직도 임기가 2년 이상 남았는데, 괜한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느라 국사를 그르칠 게 심히 우려된다. 나로 인해 네가 겪어야 할 고초가 괴로울 뿐이다. 부디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주기 바란다. 환절기에 옷 따뜻하게 입거라.

김의겸 선임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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