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손병희 선생님! 고맙습니다! |
민족 대표 33인의 대표로 3.1만세 운동을 주도하며 조선독립을 선언한 의암 손병희 선생은 기상이 담대하고 비범한 인물이었다. 3.1만세운동 당시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선생은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 성질을 가진 윗사람 중의 큰 인물이며 굉장한 정열을 가진 비범한 인물'이라고 기록했다. 미국의 LA 타임스 사설도‘손병희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그것은 황야에서 외치는 예언의 소리’라고 보도 했다. 선생이 주도한 3.1만세 운동은 우리 겨레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5.4운동이나 인도독립운동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 등 약소민족 국가에도 강렬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래서 세계의 언론이 3.1운동과 의암을 크게 보도했다. 민족 지도자 의암 손병희 선생이 태어난 곳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정부는 선생의 유허지에 36억7천여만 원을 들여 1만 1천 7백여 평의 부지 위에 영당과 기념관 등을 세우고 성역화 했다. 잘 단장된 경내에는 영당과 생가 기념관 동상 등 시설이 적절한 위치에 자리 잡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관심을 끄는 것은 선생이 태어나서 자란 생가. 나즈막한 야산 아래자리 잡은 4칸짜리 초가 앞쪽에는 넓은 청원 들이 열려 있고 곡식을 저장하는 부속 창고 시설까지 갖춰졌던 것으로 보아 여유 있는 가세였던듯 했다. 기념관을 들어서자 정면에서 3.1만세운동 물결이 일었다. 그림이지만 생동감이 넘쳐났다. 성난 만세 함성이 터져 나오는 듯 했다. 사람이 하늘이라는 천도교 사상을 모두 함축한 휘호와 문서 서한 신문호외 기사 자료도 전시 됐다. 전시자료 중 눈길을 끄는 것은 가족사진. 1914년 촬영된 선생 일가는 대가족이었고 사위인 방정환 선생도 함께하고 있었다. 또 선생이 쓰던 지필묵과 부채 가방과 지팡이 대형 가마솥 3개를 비롯한 유품 생활용품 등 150여점이 온전히 전시되어 있어 다행스러웠다. 전시품 한 점 한 점에서 선생과 가족들의 나라사랑 얼이 묻어나는 듯 했다. 혁명가이자 종교인이고 교육자이기도 했던 의암은 서자로 태어나 반항아 기질이 있었으며 청소년기에 방황했다. 1882년 동학에 들어가면서 진로를 찾은 의암은 이듬해 동학교주 최시형을 만난다. 최시형은 첫 눈에 큰 인물을 알아보고 고된 수련을 시킨후 교세 확장의 선두로 내세웠다. 몇 년 후인 1894년 2월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운동이 고부에서 일어났고 9월에는 전봉준이 지휘하는 10만 명과 의암의 10만 농민군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결전을 벌였다. 동학 혁명군의 항일전투는 대패로 끝나고 전봉준 최시형 등은 체포돼 사형됐다. 의암은 행상 등으로 변장하여 피신 생활을 하다 일본을 거쳐 상해로 망명했다. 망명 독립운동가들과 손잡고‘진보회’를 조직, ‘갑진개화혁 신운동’을 벌였다. 3대 교주였던 의암은 동학을 천교도라 개칭했고 1907년 귀국 후 교세 확장과 보성 전문학교 등을 인수 인재 양성에 열성을 기울이는 한편 천도교 월보를 발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의암은 1912년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고 이곳에서 3년 동안 480여명의 독립운동 요원을 양성했다. 7년 후에는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의암을 비롯한 애국선열들이 상당기간동안 치밀한 준비 끝에 결행한 이 쾌거는 혁명이었고 겨레의 진운을 바꿨다. 그 중심에 섰던 의암은 겨레의 큰선열로 빛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