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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부곡, 손병희 2014-11-16
[기고] 다 부르지 못한 ‘사부곡’
안병희  |  webmaster@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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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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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을 하고 꿈에 그리던 내 고향 여주로 내려왔다. 하리 현대아파트보금자리를 틀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여생의 행복한 전원일기를 쓰려고 한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산골짜기 조그만 텃밭에 나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나눠 줄 채소와 곡식을 정성스럽게 가꾸는 재미는 마음의 풍요로운 노후생활을 가져다 주고 있다.…<중략>”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기 문득 발견한 2쪽 짜리 메모장에 담겨진 글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아버지는 95년 교직생활을 마치고 당신이 태어나서 뛰어 놀고 미래를 설계했던 고향으로 내려오셨다. 나도 긴 객지생활의 방황 길을 끝내고 아버지를 따라 여주로 내려와 96년 1월 공직에 입문했다.

생활력이 강하셨던 부모님은 자식들의 부양을 거부하신 채 두 분만의 터전을 마련하시고 농촌생활에 취미를 붙이셨다.

금년 봄부터 고향마을 앞에 있는 모래적치장이 논으로 복구되면서 농사일이 가중되었음에도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지친 몸을 살펴보지도 않으시고 쉴 새 없이 움직이셨다. 여름 뙤약볕에서도 논두렁이 아깝다고 자갈을 골라내며 콩을 심으셨다. 이렇게 아버지는 기력을 너무 소진해 버린 탓에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9월 25일, 끝내 기력을 회복하지 못한 아버지는 향년 86세의 나이로 가족 곁을 떠나가셨다. 지금까지 나는 아버지께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이 늘 받아 오기만 했다.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하면 그저 가만히 들어 주시고 “그래, 한번 해봐라”는 그 한 말씀이 전부였으며 객지에 나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 왔을 때도 “괜찮다. 고생했다.”라며 포근한 눈빛으로 위로해 주시던 분이었다.

3·1운동의 주역이자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을 존경하시어 내 이름도 “병희”라고 지어 주셨고, 몇 년 전부터는 천도교에 입문하여 자식을 위해 열정적으로 기도하셨다.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시고야 비로소 너무나 큰 분이었다는 걸 절실히 느꼈으며 그 허전함이 답답함으로 가슴을 짓누르고 억눌렀다.

어머니의 은혜가 크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은혜가 이토록 큰 줄 미처 몰랐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어야 할 당연한 일이지만 그동안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들과 베풀어 주셨던 은혜는 무엇으로 갚아야 할는지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아버지가 교편을 잡고 있던 이천북중학교 정문 앞에서 사진을 함께 찍었던 그 때가 불현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 아들 장기 잘 둔다고 학교 선생님과 대적시켜 주시고, 큰 사람이 되라고 서울로 유학을 보내고 격려해 주시던 든든한 후원자였다.

“애비야 오늘 바쁘지 않으면 밭에 데려다 주렴”전화로 말씀하시면서도 혹여 자식에게 피해 주지 않으실까 늘 미안해 하시던 아버지의 음성은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편안한 마음으로 밭으로 모셔드리지 못하고 밭일을 함께 도와 드리지 않았던 자식의 매정함이 아버지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거다.

“집에 가자. 내가 할 일이 있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흘려버리고,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내팽겨 친 불효자는 끝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52년의 세월 속에서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지만 이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 놓아 소리치고 싶다.“아버지!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안병희 여주시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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