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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손병희, 500억 원이상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지원 2012-08-07
1919년 3.1독립선언 즈음에..
손병희 선생과 천도교인들이 마련한 독립운동자금 중에서..
- 30만원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여 지원하고..(현재가치 450억 원..)
- 도산 안창호에게도 3만원을 지원.. (현재가치 45억 원..)

과연..천문학적인 독립운동자금없이 대한민국의 건국이 어떻게 이루어 졌을까?
비밀에 묻혔던 그 의문의 실상을 의암경영연구소가 풀고 있다...
*의암경영연구소*

한편 3.1운동 직후 의암을 비롯하여 당시 천도교 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체포당하여 구금되어 있었으므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는 직접적이고 선도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숙, 최
동오 등 젊은 천도교인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파견하여 활동하게 함
과 아울러 상당한 군자금을 지원하도록 조치하였다.58) 이에 따라 천
도교에서는 비밀리에 중국 변경과 가까은 서북지방의 천도교인 이군
오, 최석련 등을 통하여 김의종을 중국에 잠행하게 하여 30만원의 자
금을 신숙에게 전하고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여 지원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안창호에게 3만원을 지원한 것으로 전해지며 그
외에도 비밀리에 수시로 상당히 많은 군자금을 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재정적 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 극비리에 이
루어진 것이므로 그 정확한 액수나 전달 방법, 사용처 등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57) 이현희, 앞의 책 3.1혁명, 그 진실을 말한다 , 311쪽.
58) 신 숙, 나의 일생 , 일신사, 1963, 80-90쪽.
276 동학학보 제10권 1호(통권 11호)
이처럼 의암의 지시로 천도교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할 수 있
었던 자금의 근원은 바로 천도교인들의 구국을 위한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각종 성금의 종합이었다. 당시 일제하 천도교 교인들은 생활
수준이 높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3.1운동 이전부터 꾸준히 교회
의 성금을 위장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축적하여 온 것이다. 이는
1910년대의 독립운동을 위한 거교적인 의지의 총량으로 이러한 위업
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각종 명목으로 헌납된 천도교인들
의 군자금은 은밀히 천도교 중앙총부로 위장 송금되었고, 그것은 군
자금화되어 적립되었다. 따라서 천도교총수 의암 손병희성사는 이를
천도교의 자체사업보다 독립운동의 거사자금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자금으로 우선 전용하여59) 천도교인들의 구국독립의지를
실질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8. 결 론
1919년 3월 1일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한국민의 독립의 절규요 자
주독립선언이기도 한 혁명적인 3.1운동은 그 시초가 국내 각 종단 중
민족종교인 동학을 이은 천도교인에 의해 계획, 실천단계로 옮겨진
것으로 상해판 독립신문의 표현대로 이날이 곧 민족부활의 구국운동
이었다.
천도교인이 1910년 8월이래 국권피탈은 절대로 부당한 것이며 이
를 저지하지 못하였던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면서 그해 9월부터 천도
교의 지도자 의암이 동학혁명의 재현을 위해 봉황각이나 상춘원 자택
59) 이현희, 동학혁명과 민중 , 대광서림, 1986, 311-312쪽.
의암 손병희성사와 천도교의 3.1운동 277
등을 통해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동학혁명의 민주주의
적 구국의식이 충만하였던 천도교인이 앞장서서 설득과 자금지원으로
기독교, 불교, 학생대표와 손잡고 전국적인 3.1운동의 거사를 성사시
킨 것이다.
당시 천도교인의 숫자는 흔히 2백여 만명 정도였다고 하며 풍족한
자금과 활발하고 치밀한 전국적 조직, 의암 등 지도급 인사들의 인재
영입중이 종단을 대표하여 타종교단체에까지 자금을 지원하면서 계획
단계에서 대중화운동단계로까지 동참적 항쟁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
다. 이는 동학의 개벽사상과 시천주, 사인여천의 민족 구국이념을 편
수운 최제우의 인류구원사상에서 출발하였다고 본다. 수운, 해월 최
시형, 의암 손병희 등 동학 지도자가 개혁과 자립사상을 종단적 차원
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강압적으로 탈취하고 영원히 식민화
하려는 불순한 저의가 담긴 일제의 한국 강점을 결연히 분쇄하려는
민족주의적 혁명의식으로 확대, 마침내 세계적인 찬사를 받은 3.1운
동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철권폭압 통치하에서 천도교인만 가지고는 균형있는 성사가
불투명하다는 천도교 총수 의암의 판단과 비전있는 리더십에 따라 준
비가 착실히 진행되었다. 더욱이 기독교, 불교 등 타종단과의 연대제
휴가 전 국민적 지지동참을 유도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대중적, 일원
적, 비폭력적 투쟁방법을 택해 민족대표를 구성하여 조직적으로 거사
를 준비하였다. 대중적 동참의식에 따라 중앙학교팀, 유교계와 학생
층도 계획단계에서부터 함께 준비하였으나 실천 단계에서 연학의 불
충분과 기성세대와의 의견차이로 이 두 계층은 민족대표 33인 구성
에서 탈락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뒤에는 다른 형태로 거국 거족적 동
참항쟁이라는 자주자립의 이념에 따라 함께 격조높게 이 운동을 이끌
어 나갔다.
1904년까지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지도하였던 의암은 몇가지 저술
278 동학학보 제10권 1호(통권 11호)
과 논강을 통해 외국에서의 발전하는 문물을 접하고 나서 반봉건운동
과 함께 격변하는 시대정세에 능동적으로 부응, 대처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체험적으로 직감하여 신문화 지식운동에 앞장서서 진두지
휘하였다. 또한 3.1운동을 전후로 한시기에 평생을 구국의식으로 일
관한 의암은 신문명의 감각이 뛰어나 이미 대한독립선언이나 2.8독
립선언 등의 투쟁의식을 인식하고, 이 혁명적 항쟁을 지휘하여 국민
국가를 형성하는 것만이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선
양, 실천하였다. 이에 아시아를 격변, 개혁케 한 3.1운동 직후 국내
외에 7,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거나 될 찰나에 있었을 때 의암이
몇 개처의 임시정부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수반격인 대통령에
추대되고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의암은 3.1운동때 서대문형무소에 자진 구금되었다가 고문
으로 나와 순국하였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지 못
하였다. 이처럼 의암은 독립운동상에서나 대중들에게 덕망과 헌신적
구국의식의 명망이 높았던 것으로 그는 천도교계만의 지도자가 아니
며 거국 거족적 3.1운동을 지휘한 민족적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으
며, 이러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천도교가 3.1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후원으로 대한민간정가 구성될 단계에 있었고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자금과 인적자원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의암
손병희 성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태동시켜 민주정치를 꽃피게 하였
으므로 그에게 우리나라의 법통성이 존재해 있다고 평가된다.
의암 손병희성사와 천도교의 3.1운동 279
<참고문헌>
동암일기 .
묵암비망록 , 1910년 9월 30일.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 서울신문사, 1946.
선우훈, 민족의 수난 , 태극서관, 1948.
「손병희의 경찰신문조서」.
신 숙, 나의 일생 , 일신사, 1963.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의암손병희선생전기 , 1967.
이현희, 3.1운동사론 , 동방도서, 1979.
이현희, 손병희 , 동아일보사, 1995.
이현희, 3.1혁명, 그 진실을 밝힌다 , 신인간사, 1999.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 , 집문당, 1983.
최동희, 천도교백년약사 , 천도교중앙총부, 1981.
280 동학학보 제10권 1호(통권 11호)
<국문초록>
의암 손병희성사와 천도교의 3.1운동
이현희
1919년 3월 1일 민족항쟁을 추진, 전개하는 과정에 있어서 주도
적 임무를 담당한 계층은 종교계였으며, 그 중에서도 의암 손병희
(1861~1922)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계가 주동이 되었다. 따라서
천도교는 민족운동의 모의, 준비와 자금지원, 동지를 규합하는 중추
적인 임무를 스스로 담당하여 민족항쟁을 이끌어 나갔다. 천도교인
이 1910년 8월이래 국권피탈은 절대로 부당한 것이며 이를 저지하
지 못하였던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면서 그해 9월부터 천도교의 지도
자 의암이 동학혁명의 재현을 위해 봉황각이나 상춘원 자택 등을 통
해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동학혁명의 민주주의적 구
국의식이 충만하였던 천도교인이 앞장서서 설득과 자금지원으로 기
독교, 불교, 학생대표와 손잡고 전국적인 3.1운동의 거사를 성사시
킨 것이다.
당시 천도교인의 숫자는 흔히 2백여 만명 정도였다고 하며 풍족한
자금과 활발하고 치밀한 전국적 조직, 의암 등 지도급 인사들의 인
재 영입중이 종단을 대표하여 타종교단체에까지 자금을 지원하면서
계획단계에서 대중화운동단계로까지 동참적 항쟁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이는 동학의 개벽사상과 시천주, 사인여천의 민족 구국이념
을 편 수운 최제우의 인류구원사상에서 출발하였다고 본다. 수운,
해월 최시형, 의암 손병희 등 동학 지도자가 개혁과 자립사상을 종
단적 차원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강압적으로 탈취하고 영
의암 손병희성사와 천도교의 3.1운동 281
원히 식민화하려는 불순한 저의가 담긴 일제의 한국 강점을 결연히
분쇄하려는 민족주의적 혁명의식으로 확대, 마침내 세계적인 찬사를
받은 3.1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철권폭압 통치하에서 천도교인만 가지고는 균형있는 성사
가 불투명하다는 천도교 총수 의암의 판단과 비전있는 리더십에 따
라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었다. 더욱이 기독교, 불교 등 타종단과의
연대제휴가 전 국민적 지지동참을 유도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대중
적, 일원적, 비폭력적 투쟁방법을 택해 민족대표를 구성하여 조직적
으로 거사를 준비하였다. 대중적 동참의식에 따라 중앙학교팀, 유교
계와 학생층도 계획단계에서부터 함께 준비하였으나 실천 단계에서
연학의 불충분과 기성세대와의 의견차이로 이 두 계층은 민족대표
33인 구성에서 탈락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뒤에는 다른 형태로 거국
거족적 동참항쟁이라는 자주자립의 이념에 따라 함께 격조높게 이
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철저한 사전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1919년 3월 1일 국민국가
실현과 완전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개된 3.1운동은 천도교의 합리
적인 민중운동 3대 원칙에 따라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는바 천도
교와 제3세 교조 의암 손병희는 강한 리더십에 따라 그 선도적 임무
를 수행하였다.
또한 1904년까지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지도하였던 의암은 저술과
논강을 통해 외국에서의 발전하는 문물을 접하고 나서 반봉건운동과
함께 격변하는 시대정세에 능동적으로 부응, 대처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체험적으로 직감하여 신문화 지식운동에 앞장서서 진두지휘
하였다. 평생을 구국의식으로 일관한 의암은 신문명의 감각이 뛰어
나 이미 대한독립선언이나 2.8독립선언 등의 투쟁의식을 인식하고,
이 혁명적 항쟁을 지휘하여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것만이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선양, 실천하였다. 이에 아시아를 격
282 동학학보 제10권 1호(통권 11호)
변, 개혁케 한 3.1운동 직후 국내외에 7,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
었거나 될 찰나에 있었을 때 의암이 몇 개처의 임시정부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수반격인 대통령에 추대되고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의암은 3.1운동때 서대문형무소에 자진 구금되었다가 고문
으로 나와 순국하였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의암은 독립운동상에서나 대중들에게 덕망과 헌신
적 구국의식의 명망이 높았던 것으로 그는 천도교계만의 지도자가
아니며 거국 거족적 3.1운동을 지휘한 민족적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의암 손병희, 3.1운동, 갑진개화운동, 천도교, 봉황각, 대한민국임
시정부, 대한민간정부, 105인사건, 서대문형무소
의암 손병희성사와 천도교의 3.1운동 283
A Study on Son Byong Hee and 3.1
Independence Movement
Lee, Hyun Hee
Son Byong Hee established singular leadership and made
himself as the top leader after the failure of Donghak peasantry
movement in 1894. Son-Byong Hee was the driving force of 3.1
independence movement.
He mustered men under his banner for the racial movement.
Finally he succeed 3.1 independence movement with a
christian, a buddhist and a student class. Son had a leadership
of adamant and he led of new civilization movement.
Accordingly a like minded person was under the presence of
him. He was a national leader.
Key Words: Son Byong Hee, 3.1 Independence Movement, Kabjin
Movement, Chondogyo, Bonghwanggak, 105 Persons
Incident
 
  대한독립선언서 선언일자 논란
  대한민국은 동메달?(남성환회원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