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선언일 기념 의암경영세미나..준비자료에서 선보임/의암경영연구소 제공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3·1운동”이 들어있는 까닭은
한인섭(서울대 법대 교수)
1948년의 제헌헌법의 前文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建立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再建함에 있어서···”로 시작한다. 이 문장에는 제헌헌법 당대의 역사인식이 흠뻑 스며있다. 첫째, 대한민국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1948년의 대한민국은 1919년의 대한민국을 건립한 그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했다는 인식이다. 여기서 대한민국 건국의 계기, 혹은 元氣로 인식되고 있는 사건은 (기미) 3·1운동이었다.
그동안 헌법이 9차례 개정되었고, 헌법 전문도 여러 변형을 겪었다. 전문의 개정에 따라 4·19와 5·16이 들어가기도 하고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변형, 삭제 없이 존속되어온 것은 “3·1운동”이다. 여기서 여러 질문이 자연히 떠오른다. 3·1운동이 위대한 독립운동임은 당연히 알지만, 왜 수많은 항쟁 중에서 유독 3·1운동만이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는가. 3·1운동은 대한민국 60년사에서, 혹은 대한민국 90년사에서 과연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할 것인가. 오늘에 있어서 3·1운동은 헌정사적으로는 어떤 의미로 새겨질 수 있을까 하는 것 등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것이다. 이 조문의 연혁은 1919년으로 소급한다. 1919년 4월 11일 중국의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하 “임시헌장”이라 한다)이 제정되었다.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그 뒤 임시정부는 여러 헌법문서를 제정하는데, 그 모든 헌법문서(임시헌법, 임시약헌, 임시헌장 등)의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4월에 이르러, 한반도를 영토로 하는 이 나라는 “민주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기미독립선언은 “조선의 자주국임과 조선민이 자주민임을 선언”했지만, 그 자주국의 국체·정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 임시헌장을 통해 처음으로 민주공화제의 국가가 선포되었다.
1910년 이전의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제 국가였다. <대한국국제>(1899년)에 따르면, “대한국은 제국”이며, “대한제국의 정치는 전제정치”이며, “대황제께서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는 나라였다. 이러한 전제황권 상태에서 1910년 일본에 강점당하여 식민지로 전락했고, 대한제국의 백성들은 나라없는 조센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식민지 조선은 “만세일계의 일본천황”이 총람하는 체제 하에 편입되었다. 1910년의 한반도에서는 총독체제와 헌병정치의 강권 하에서 모두들 질식상태로 살아야 했다.
1919년 3월 1일부터 거족적 봉기가 일어났다. 일제는 이를 “조선소요사건”이라 불렀지만, “조선의 자주국임과 조선민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기미독립선언을 통해 드러난 폭풍노도의 물결은 일제를 당혹케 했고, 세계여론을 움직였다. 무엇보다 독립운동가들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3월과 4월의 독립만세운동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주체적 존재가 거대한 실체를 드러냈다. 왕조가 망한 자리에, 새로운 주권자로서의 국민, 그것도 전국각처의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자주국의 주권담지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를 포착하여 한반도 내에서 13도 대표자들이 <한성정부>를 구성했다. 해외의 애국자들은 상해에 집결하여 <정부>를 구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1919년 4월 10일 밤 10시에 상해의 김신부로의 조그만 다락방에서 29명의 애국자들이 모였다. 그들은 건국을 하고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치하였다. 그들은 새로이 건설될 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그 국호는 법률을 전공하고 해외의 독립운동의 각종 문건 작성에 깊히 관여하고 있었던 조소앙의 작품이었다. 1919년에 처음 명명된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948년 제헌헌법 제정과정에서도 거의 이의없이 채택되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기미년에 2천만 민족의 피로 물들여 명명한 국호”이고, “이 국호로써 세계만방에 독립을 선포”한 것인데다, “3·1운동 이후로 30여년간이나 승계해 왔고” “현금 국내에서 각 방면으로 사용”해온 “입에 익고 귀에 익은 국호”이기 때문이다. 즉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과 건국과정에서 상징의 중심축이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국호로 선정된 것은, 대한국의 국제가 전제군주제가 아니라 민주공화제라는 데 대해 이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3·1운동이라는 범민족적 희생을 발판으로 하여 성립하는 신생국가는 <국민>의 주권성에 기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국민은 3·1운동을 통해 그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헌법적으로 말하자면, 3·1운동을 통해 헌법제정권력자로서의 국민의 존재가 드러났다. 한성과 상해의 애국자들은 그로써 드러난 헌법제정권력자의 일반의지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법적 표현으로 응답했던 것이다.
그러면 1919년의 3월과 4월에 걸쳐 진행된 독립만세운동은 무엇으로 명명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는 “3·1운동”이란 명칭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1948년 제헌헌법 이래 그 용어가 정부 차원에서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운동”이란 명칭을 붙일 때, 다른 독립운동사건과 구별되는 “3·1”의 헌정사적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예컨대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신간회 운동 등의 독립운동과 1919년의 사건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단지 규모의 차이일 뿐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헌법전문에서 왜 “3·1”만 유독 언급되고 있는가 의문이 든다. 예컨대 헌법전문을 “기미년 3·1운동을 비롯한 일련의 독립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라고 바꾸는 것이 모든 독립운동에 대한 공평한 존중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일제시에는 물론이고, 제헌헌법 당시에도 “3·1”은 많은 운동 중의 하나(one of them)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일하고 최고의(unique & supreme)의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수많은 운동과 구별되는 “혁명”이란 타이틀이 “3·1”에 붙은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제헌헌법 제정과정에서의 헌법초안과 헌법문서에는 “3·1혁명”이란 용어가 오히려 더 자주 쓰여졌다. 유진오와 행정연구회의 공동초안에 “기미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되어 있으며, 이승만 국회의장도 헌법 전문의 예시로 “기미년 삼일혁명에 궐기하여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에 선포...” 등의 문구를 포함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다.
왜 “운동”이 아니고 “혁명”인가. 왕정으로부터 민주공화정으로의 이행은 결코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없다. 그것은 어느 나라나 혁명적 전환의 산물이다. 3·1혁명을 통해 우리는 조선왕정, 대한제국의 제정, 식민지 전제정을 벗어버리고 민주공화정인 민국체제로의 전환을 이루어낸 것이다. 비록 영토는 찾지 못했지만, 주권자인 조선인민 전체의 의식(박은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國魂)은 왕정을 뒤로 하고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을 채택하는 방향으로 결집된 것이다. 혁명의 또하나의 결정적 요소는 유혈성이다. 왕정, 식민지로부터 독립민주공화제로의 이행은 거대한 인민의 유혈을 동반한다. 어느 나라나 그러했다. 1941년 대한민국 건국대강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獨立宣言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의 發因이며 신천지의 開闢이니…(중략)…이는 우리 민족이 3·1憲典을 발동한 元氣이며 동년 4월 11일에 13도 대표로 조직된 臨時議政院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만들어 반포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自力으로써 異族專制를 전복하고 5천년 君主政治의 구각을 파괴하고 새로운 民主制度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소멸하는 제일보의 착수이었다. 우리는 대중의 핏방울로 창조한 신국가 형식의 초석인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정의 성립은 반드시 헌법의 제정을 필수로 한다. 입헌민주국가는 주권의 소재, 주권의 행사방식을 헌법을 통해 정한다. 신생국가라면 반드시 성문헌법의 형태로! 그리하여 “3·1”을 “혁명”으로 인식한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4월 11일 새벽에 헌법의 대강을 가결하였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그것이다. 10개로 이루어진 간명한 이 임시헌장에 민주헌법으로의 핵심이 두루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초안자 조소앙의 구상과 준비작업에 결정적으로 힘입은 것이었다. 임시헌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大韓民國 臨時憲章
第一條 大韓民國은 民主共和制로 함 第二條 대한민국은 臨時政府가 臨時議政院의 결의에 의하야 此를 통치함 第三條 대한민국의 人民은 남녀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無하고 一切 平等임 第四條 대한민국의 人民은 信敎 言論 著作 出版 結社 集會 信書 住所 移轉 身體 及 所有의 自由를 享有함 第五條 대한민국의 人民으로 公民資格이 有한 者는 선거권 급 피선거권이 有함 第六條 대한민국의 人民은 敎育 納稅 及 兵役의 義務가 有함 第七條 대한민국은 神의 意思에 의하야 建國한 精神을 세계에 발휘하며 進하야 인류의 文化 及 和平에 공헌하기 위하야 國際聯盟에 가입함 第八條 대한민국은 舊皇室을 우대함 第九條 生命刑 身體刑 及 公娼制를 全廢함 第十條 臨時政府는 국토회복후 만1개년내에 國會를 소집함
大韓民國 元年 四月 日 |
이 임시헌장은 매우 선진적이고 독창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만들고, 그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통치한다는 의회중심의 통치형태를 취한다. 무엇보다 평등 내지 균등사상이 전체를 지도한다. 인민은 일체 평등하다. 모두가 균등하게 각종 자유를 향유하며, 인민은 모두 선거권을 갖는다. 매우 특징적인 것은 “생명형, 신체형, 공창제를 전폐함”이라는 제9조이다. 생명형은 사형을 말하고, 신체형은 1910년대 광범하게 악용되었던 태형을 말한다. 공창제는 1916년 이후 일본이 조선반도에서 시행한 것이다. 이를 전폐한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사형폐지론은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일제는 태형을 자유형보다 더 남용하였는데, 임시헌장은 태형의 전폐를 내세운다. (일제는 3.1소요 이후 민심수습책 차원에서 1920년 태형을 폐지하였다.) 이로부터 우리는 신체형 없는 나라의 구상 을 확고히 가졌던 것이다. 여성의 권리 존중은 남녀평등, 보통선거권에 이어 공창제 폐지의 조항 속에서 뚜렷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임시헌장은 1919년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 3·1혁명의 원기를 받아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첫 헌법문서이다. 독립운동가들은 이 헌법을 통해 평등 및 인권의식이 충만한 민주공화제 국가의 밑그림을 그려냈다. 1948년 이래의 대한민국의 역대 헌법들은, 숱한 부침을 겪었지만, 1919년 이래 다져진 민주공화제 국가의 핵심적 법조항을 계승해왔다. 그 역사적 현재에 대한 헌정사적 인식은 1987년의 헌법 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